<20> 배우로 제작자로… ‘전설’이 된 김지미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에서 열연중인 김지미. 한국일보 자료사진

‘춘향전’(1961)의 실패 후 홍성기 감독과의 결혼 생활에 파경을 맞은 김지미는 1962년 3월 이혼에 합의하고 선민영화사를 떠나 한양영화공사의 전속 배우가 된다. 이 시기 김지미는 ‘하늘과 땅 사이에’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골목 안 풍경’과 같은 한양영화공사의 영화만이 아니라, 동보영화사의 ‘암행어사 박문수’, 세종영화사의 ‘평양기생 계월향’, 극동흥업의 ‘한 많은 미아리 고개’(이상 1962)에 출연하는 등 전방위적인 연기 활동으로 건재한 스타성을 과시했다. 바로 이때 희대의 스캔들이 터졌다. 김수용 감독이 한국 홍콩 합작으로 추진하던 ‘손오공’(1962)의 홍콩 로케이션 촬영에서 김지미는 같이 출연한 최무룡과 급속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당시 최무룡씨와 현장에 앉아 자기 속상한 얘기 같은 거 털어놓게 되지 않나. 그러다 정이 들었는데 이게 ‘빵’하고 터져 버리더라. 수습해야 하니까 안 살 수가 없게 된 거다.” 세간에 두 사람 간의 염문설이 떠돌았고, 1962년 11월 31일 밤, 김지미와 최무룡은 간통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어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른바 김지미-최무룡 간통 사건이었다.

영화 촬영장에서 함께 어깨동무를 한 배우 김지미(왼쪽부터)와 최무룡, 엄앵란.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무룡을 아낌 없이 지원했던 김지미 

“앞서 간통으로 파문을 일으킨 인기 여배우 조미령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이 남편을 가진, 그리고 아내를 가진 가정인”(경향신문 1962년 10월 31일)이었다는 점에서 사건의 파장은 컸다. 수갑을 차고도 행복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연일 언론에 실리며 구설수에 오르내렸고, 영화인협회는 이들에게 1년간의 영화 출연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배우 인생의 막을 내릴 뻔한 스캔들의 여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 영화의 스타 배우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았고, 두 사람이 미리 출연계약을 맺어 제작 대기 중인 영화만 12편이었다. 한 해만 활동을 정지해도 충무로가 휘청거릴 만큼의 김지미와 최무룡의 지분은 엄청났던 것이다. 한국영화제작자협회는 두 사람의 출연 중지에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 사건은 김지미가 살던 집을 처분해 최무룡이 아내 강효실에게 지불해야 할 위자료 248만원과 채무 78만원을 대신 갚아 주면서 마무리되었다. 이혼하면 남자 측이 위자료를 부담하는 게 관행이었고, 여성 혼자 경제력으로 자립하기 어려웠던 당시 시대상에서 정상급 스타로서 김지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배우보다 감독과 제작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 최무룡을 김지미는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피어린 구월산’(1965)으로 감독에 입봉한 최무룡은 이후 배우를 겸하는 틈틈이 ‘한 많은 석이 엄마’(1966), ‘나운규의 일생’ ‘애수’(1967), ‘제 3지대’(1968), ‘어느 하늘 아래서’(1969) 등을 연출하는가 하면 ‘선술집 처녀’(1963), ‘국경 아닌 국경선’(1964) 등의 제작에 나섰다. 대부분은 흥행에 실패해 쓴 잔을 들이켜야 했지만, 15편이나 만들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김지미의 도움에 힘입은 덕분이었다. 1969년 6월 10일 두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6년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지만 그 뒤로도 ‘동창생’(1971), ‘결혼반지’(1972), ‘명동을 떠나면서’(1973) 등에서 부부나 연인 역할로 합을 맞춘다. 훗날 김지미는 인터뷰에서 “남자는 다 어린애고,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그렇지만 함께 자녀를 낳아 길렀던 최무룡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조연 마다 않던 연기 열정 

김수용의 ‘혈맥‘(1963)에 출연하면서 김지미의 배우 경력은 전환점을 맞는다. 김영수의 희곡을 원작 삼은 이 작품은 광복을 맞은 후 남산 기슭의 해방촌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실향민들의 밑바닥 인생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린 군상극으로, 김승호와 황정순, 엄앵란, 신영균, 신성일, 최무룡, 조미령, 최무룡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한데 모은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했다. 여기서 김지미는 꽁초를 주워다 재활용 담배를 만들어 파는 밀조업자 원팔(신영균)의 동생으로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실업자 신세인 원칠(최무룡)을 사랑하는 ‘헬로우 걸’ 옥희 역을 맡았다. ’혈맥‘을 기점으로 주연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된 김지미는 도도한 카리스마의 스타에서 진지한 연기파 배우로의 변신을 모색하게 된다. 이성구의 ’메밀 꽃 필 무렵‘(1967)에선 침착한 내면연기로 장돌뱅이 허생원과의 연분을 가슴 깊이 품고 기다리는 분이의 성격을 잘 묘사해냈고, 외설 논란으로 이형표 감독이 검찰에 불려가는 촌극을 빚었던 ’너의 이름은 여자‘(1969)에선 성불구자가 된 남편 대신 대학생과 불륜을 벌이는 아내를 열연해 제15회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차지하게 된다.

1970년대 한국영화 산업이 극심한 불황과 침체의 터널에 들어서면서 한 해 20~30편을 상회하던 김지미의 작품 편수 또한 현격히 줄어들게 된다. 1971년에는 주인공 모화 역으로 내정되어 있던 ‘무녀도’(1972)의 주연이 촬영 직전 느닷없이 윤정희로 교체되면서 태창영화사와 분쟁에 들어간 사건은 톱스타 김지미의 입지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연기의 집중력과 밀도가 농밀해지며 배우로서 완숙한 기량을 보이는 시기였다.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의 파란을 겪으며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 분례의 일대기를 그리는 임권택의 ‘잡초’(1973)에서 김지미는 10대 소녀에서 50대 중년에 이르는 연령대를 혼자서 소화하는 기염을 토한다.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김수용의 ‘토지’(1974)에서는 어두운 과거사를 지닌 최참판네의 며느리 윤씨 부인으로 분해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제13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이만희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1975)에서는 원작에서 문정숙이 맡았던 연상의 여주인공 역으로 분해 깊이 있는 내면연기를 보여주었다.

배우 김지미가 가수 나훈아의 넥타이를 매만지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국 하와이 관광 중에 다정한 한 때를 보내던 배우 김지미와 가수 나훈아. 두 사람의 연애와 결혼은 당대 대중의 호기심을 부르기 충분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훈아와의 결혼, 그리고 휴식 

1976년 7월 9일, 가수 나훈아와의 약혼을 선언한 김지미는 활동을 접고 6년간의 공백기에 들어선다. TV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꾸준히 인기를 관리하는 게 그 무렵 배우들의 보편적인 경향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김지미는 ‘TV라면 질색하는 스타’였다. 이 시기의 출연작은 ‘을화’(1979) 단 한편 뿐이었고, 대전에서 초정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운영하며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사람들은 대체로 영화에 많이 출연하고 요란을 떨어야 좋은 배우로 알지만 1년에 하나, 10년에 하나라도 작품다운 것을 하는 게 옳은 일인 것 같다.” 나훈아와 결별한 후 ‘화녀 82’(1982)로 영화계에 복귀한 중년의 김지미는 임권택 감독과 손잡고 의욕적으로 ‘비구니’(1984)의 촬영에 임한다.

1984년 설악산 신흥사에서 영화 '비구니' 출연을 위해 배우 김지미가 진짜 비구니들에 의해 삭발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지미가 영하사 지미필름을 설립하고 첫 작품인 '티켓' 제작발표회를 연 후 후배 배우 전세영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작자로서도 충무로에 ‘우뚝’ 

‘만다라’(1981)에 이어 깨달음과 세속적 구원의 문제를 다룰 예정이었던 이 작품은 전체 시나리오의 5분의 1가량 촬영이 진척되다가 불교계의 거센 반발로 제작이 중단되고 만다. 미국에서 귀국해 삭발까지 감행하며 남다른 각오로 임한 김지미로서는 뼈아픈 경험이었고 나중에 이 영화를 ‘사산한 자식’에 비했다(‘비구니’의 미완성 필름은 2013년 태흥영화사의 창고에서 발견되어 부분 복원판으로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다). “그러다 임권택 감독, 정일성(촬영)감독, 송길한 작가 그리고 나까지 패잔병 넷이 더 좋은 영화를 만들자면서 전국을 돌아다녔고 영화 ‘티켓’(1986)과 ‘길소뜸’(1985)이라는 작품이 탄생한 거죠.” 이산가족 상봉으로 전쟁통에 헤어진 가족과 재회하지만 세월의 간극을 넘지 못하고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소뜸’의 화영, 항구의 다방에서 젊은 여성들을 고용해 매춘을 강요하는 ‘티켓’의 민마담 역은 다져진 연기 내공에 인생의 경험이 녹아들면서 원숙한 경지에 이른 김지미 배우 인생에 한 정점을 이룬다.

충무로는 새로운 세대의 영화인들로 물갈이되었고 원로 영화인들이 설 자리는 좁아져 갔다. 그럼에도 김지미는 ‘명자 아끼꼬 쏘냐’(1992)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기까지 오랫동안 현역으로 살아남았다. ‘티켓’를 창립작으로 한 지미필름을 설립, 기획과 제작에도 손을 댄 김지미는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추억의 이름으로’(1989), ‘불의 나라’(1989)를 잇달아 성공시키는 한 편으론 영화인 특유의 선구안으로 ‘마지막 황제’(1987)와 ‘로보캅’(1987)을 국내에 수입, 배급하기도 했다. 영화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고수하며 도전을 거듭한 김지미의 영화 인생은 명멸하길 거듭하는 스타 한 사람을 넘어서, 한국 영화사의 산 증인이자 빛나는 배우의 초상으로 남았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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