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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신뢰→안보… 일본 보복 명분 ‘오락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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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신뢰→안보… 일본 보복 명분 ‘오락가락’

입력
2019.07.11 18:54
수정
2019.07.11 23:48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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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규제 한국 산업 ‘급소’ 겨냥 치밀함… 근거엔 연일 말 바꿔

총리실 주도ㆍ외무성 소외, 정부내 소통 부족… ‘北 연관’ 궤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9일 총리관저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중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9일 총리관저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중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1. “한국이 징용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까지 제시하지 않으면서 양국 간 신뢰관계가 손상됐다.”(1일 일본 경제산업성)

#2. “1965년 청구권 협정은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인데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의 문제.”(3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3. “한국의 수출관리상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다. (부적절한 사안이 북한과 연관돼 있느냐는 질문에) 개별 사안에는 답변을 삼가고 싶다.”(7일 아베 신조 총리)

일본 정부의 한국을 겨냥한 무역 제재와 관련해 주무부처인 경제산업성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내놓은 발언들이다. 제재의 배경으로 징용문제를 언급하더니 신뢰 손상을 들면서 결국 대북 제재를 끌어들여 북한과의 연관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도쿄의 외교 소식통들은 이처럼 갈수록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 명분이 흔들린 것을 두고 “무역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한 다음 ‘경제 보복’이란 비판을 피하기 위한 이유를 찾다 보니 일본이 북한까지 끌어들여 억지 논리를 세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일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등 3개 품목에 대한 대 한국 수출 규제 강화조치가 발표됐을 당시만 해도 한국의 주력산업에 필수적인 소재만을 겨냥한 ‘핀포인트’ 제재의 치밀함을 보인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이 한국을 주도 면밀하게 때릴 카드는 다수 확보해 놓았지만, 이에 대한 명분과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며 ‘징용’→‘신뢰’→‘안보’로 오락가락한 배경은 우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포함한 총리관저와 자민당 측근 의원들만의 독단적이고 강력한 드라이브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있다. 이번 조치를 기획한 인물로 총리관저의 이마이 다카야(今井尚哉) 정무비서관이 지목된다. 이마이 비서관은 경제관료 출신인 만큼 한국의 경제 급소를 공략할 수 있는 방안을 준비했다는 관측이 많다. 안전보장상 필요할 경우 무역규제를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의 회색 지대를 공략한 것이다. 집행자로는 아베 총리 보좌관 출신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장관이 나섰다.

정작 한일관계를 조율해 온 외무성은 소외됐다. 그러면서 외무성을 비롯한 관료조직이 제기하는 한일관계 악화, 일본 기업의 부메랑 피해에 대한 우려는 주요 관심대상에서 밀려난 셈이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총리관저와 총리 주변의 강성 의원들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되면서 정당한 명분 마련보다 최대 효과를 갖춘 보복조치 마련에 무게를 둔 것이다. 정부조직 내 소통부족이 공격의 명분과 근거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관련 판결 이후 일본의 관련부처들은 대항조치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 올 2월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과 거래하는 일본 기업들의 수출입 목록을 취합하면서 100여개의 대항조치 목록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처럼 준비된 수단들을 언제 실시하고 어떤 카드부터 꺼낼 것인지는 총리관저가 결정했다. 한국에만 피해를 줄 수 있는 방안이 아니라 일본 수출기업까지 피해를 줄 방안이 첫 카드로 선택된 것은 의외였다. 극적인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공격 수단은 마련했으나, 이를 납득시킬 명분과 근거는 상대적으로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손제용 릿교대(立敎)대 법학부 준교수는 “한국 정부에 깊은 불신이 있는 아베 총리와 총리관저, 자민당 강경파 정치인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며 “일본 정부의 대응논리에는 관료조직이 준비한 명분뿐 아니라 정치권에서 만들어져 정부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불분명한 주장들이 혼재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조치로 대내외의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는 지적에도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참의원 선거(21일) 이후에도 일본의 강경 태도는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명분보다는 한국을 한번 제대로 때리겠다는 의도가 강하다는 것이다.

일본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한국을 공격하는 대표적인 장면은 최근 ‘부적절한 사안’을 둘러싼 공방이다. 일본 정부가 모호한 태도로 근거를 제시하지 않자 정부와 가까운 언론이 나섰다. 보수ㆍ우익성향의 후지뉴스네트워크(FNN)와 산케이(産經)신문은 10일과 11일 “한국에서 생화학무기 제조에 전용 가능한 물자가 북한 우호국에 부정 수출된 자료를 입수했다”며 “한국의 수출관리 체계가 엉망”이란 취지의 보도를 내보냈다. 산케이신문은 ‘한국 정부 관계자에 대한 취재’임을 밝혔다. 일본 정부가 향후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이 보도를 근거로 무역 규제를 강화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NHK는 9일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 사린가스 제조물질에 대한 한국 측 무역관리를 지적했다. 일본 국민들에게 트라우마인 1995년 도쿄 지하철 테러에 사용된 사린가스와 북한을 활용해 부족한 정당성을 만회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들이 제시한 자료는 우리 산업통상자원부가 매년 전략물자 무허가 수출 적발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수출관리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다는 방증으로 일본산 불화수소가 북한으로 들어간 사례는 없었다. 이와 관련,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11일 오히려 일본에서 불화수소 등을 북한에 밀수출한 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일본에서도 1996~2003년 30건 이상의 대북 밀수출이 적발됐는데, 이 중 생화학무기 제조 등에 전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가 포함된 사례는 6건에 달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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