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레이먼드(1938~2019) 

※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오크파크는 미국사회의 고질적인 현안인 재분리(Resegregation), 즉 인종 주거 분리 차별을 선구적으로 극복한 시카고 교외 마을이다. 1960년대 말 마을 백인 주민들은 자치의회와 함께 부동산업자 등의 재분리 시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 및 각종 지원책으로 백인 이탈을 최소화하며 흑인 이주민을 적극 수용했다. 그 중심에 무료 부동산 소개서비스를 통한 비영리 인종통합 시민운동 단체 '오크파크주택센터'가 있었고, 리더인 설립자 바비 레이먼드가 있었다. oprhc.org

‘분리(Segregation)’는 차별의 양식이자 하나의 이념이다. 법- 제도가 쇠사슬과 채찍을 금지해도 차별로서의 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을 모색한다. 아파트 단지 등 주거지역 전체에 담장을 두르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이른바 ‘빗장 공동체(gated community)’가 단적인 예다. 경제적 신분 지위는 주거와 교육-문화등 현대인의 삶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뻔한 얘기지만, 가난한 지역일수록 공공 인프라가 부실하고, 교육의 질과 직업 선택의 기회, 구직 네트워크 등 사회자본이 취약하기 마련이다. 분리는 차별을 재생산하는 무한 폐쇄회로이자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분리-차별의 채찍은 살갗이 아니라 영혼을 할퀸다. 모욕감과 분노를 자극하고, 막막한 절망감으로 까라지게 한다. 분리는 공동체 안에 철조망 없는 게토(Ghetto)를 구축한다. 그 게토의 담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내면화한다. 분리-격리-배제는 점점 이상하지 않은 일, 바람직하진 않아도 어쩌지는 못할 일이 된다.

인종-피부색과 출신지역에 따라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는, 대도시 주변이면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현상을 ‘재분리(Resegregation)’라 부른다. 거기엔 인종 주거분리가 개개인의 부의 격차나 문화 동질성에 이끌린 탓만이 아니라, 은밀하고도 집요한 분리 차별의 결과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1968년 민권법 제8조 ‘공정 주택(Fair Housing)’조항은 인종을 근거로 주거지 선택권을 제한하는 모든 제도와 관행을 불법화했지만, 지배집단(인종)의 의식과 텃세까지 통제하진 못했다. 주택금융기관과 부동산 소개ㆍ관리업체들도 법 이전에 주민들의 바람을 존중해야 했다. 그들은 법을 우회하는 다양한 경로를 개척했다.

미 연방-주정부가 의료보건시스템과 함께 가장 난감해하는 사회문제 중 하나도 재분리, 즉 주거 분리 차별이다. 2010년 ‘오바마 케어’라 불리는 의료개혁으로 임기를 시작한 오바마 행정부가 2015년 집권 2기의 주력 정책으로 공정주택 원칙(Fair-Housing Rule)및 빈민지역 주거환경 개선을 상정한 것도 그래서였다. 주무 장관이던 연방 도시주택개발부(HUD)의 줄리앙 카스트로(Julian Castro)는 그 정책의 지향이 복지가 아닌 인권-반차별에 있다며 “우편번호가 누군가의 꿈과 포부를 저지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 1월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가 맨 먼저 전면 중단-재검토를 선언한 것도 저 정책이었다.

미국 북동부 러스트 벨트의 대표지 중 한 곳인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 교외에 1940년대 나붙은 표지판. "백인 세입자를 원한다"는 주민들의 재분리-차별 이념과 압력은 경기 불황이 겹치며 67년 최악의 흑인 폭동을 낳았다. wikipedia.org

일리노이 주 시카고 시 외곽 인구 5만 명 규모의 작은 마을 오크파크(Oak Park)는 ‘주거 통합 Social Mix’의 선구적이고도 모범적인 사례로, 재분리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언급되는 곳이다. 시카고 도심 슬럼이 팽창하며 흑인 인구가 동부 교외 백인 중산층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하던 1960년대, 오크파크의 백인 주민들은, 그 추세에 투항(집 팔고 이주)하거나 저항(흑인 유입 차단)하지 않고, 흑인 이주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면서 백인 주민들의 이탈을 최대한 억제, 인종이 공존하는 마을을 구축했다.

자치 의회 겸 행정기관인 마을 이사회(Village Board)는 연방 민권법보다 앞서 공정주택 조례(Fair Housing Law)를 제정, 금융기관과 중개업소 등이 재분리를 부추기는 행위를 금지했고, 주민소통위원회(Community Relations Commission)을 설립해 건물주협회 등 이익단체 대표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활동의 주역은 시민단체인‘오크파크 주택센터(OPHC, 현재는 OPRHC)’였다. 그들은 주택 매매ㆍ임대 시장의 최전선에서 직접 소비자들을 상대하며 조화의 점묘화를 그렸다.

바비 레이먼드(Bobbie Raymond)는 그 센터를 설립하고 만 26년 사무총장을 지낸, ‘오크파크 전략’의 총괄 리더였다. 그는 71년 자신의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오크파크의 도전: 인종 변화에 직면한 교외 한 공동체’의 구상을 주민들과 함께 실험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일어나는 일에 끌려가지 않고 우리의 뜻에 따라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했”던 바비 레이먼드가 5월 7일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아역 배우와 CF모델로 활동하던 10대 전후의 바비 레이먼드(오른쪽)와 오크파크주택센터를 설립해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1970년대 그. The Historical Society of Oak Park and River Forest, riverforest.com

20세기 들어 미국 북동부 대도시와 전통의 산업도시들(지금의 Rust Belt))은 유럽 이민자와 남부 흑인들로 급팽창했다. 그 과정은 도심 슬럼화- 주거 재분리와 병행했지만, 그 현상을 증폭시킨 것은 연방ㆍ주 정부와 금융기관, 부동산 업자들이었다.

캘리포니아 항소법원 판사 해리 프레거슨의 삶을 소개하며 60,70년대 주간고속도로 건설이 주거 빈곤과 재분리를 가속화한 과정을 살펴본 바 있지만, 더 결정적인 건 1930년대 뉴딜 정부가 전미주택법(NHA, 1934)에 따라 설립한 ‘주택 보유자 대부조합(HOLC)’이었다. 조합은 대출 신용도 평가를 명분으로 전국 239개 도시별 주거지역 치안여건 지도를 작성, 전국의 지역별 부동산 가치를 4등급(Best- Still Desirable- Definitely Declining- Hazardous)으로 분류했다. 대출 등 금융의 도움을 받아 ‘위험지역’을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위험지역을 붉은 색으로 구분한 탓에 ‘레드라이닝(Redlining)’이라 불리는 이 제도적 차별은 68년 이후 불법화했지만, 색은 잔상은 지금도 남아 인종-민족적 소수자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WP, 2018.3.28)

저 분류의 3등급, 신용 등급의 뚜렷한 쇠락이란 한 마디로 흑인 유입이 시작됐다는 거였다. 다시 말해 집값이 급격히 떨어지리라는 신호였다. 백인 주택 보유자들로서는 흑인 유입을 차단하거나 사전에 집을 팔고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게 일반적인 선택이었다. 그 과정을 부동산 업자들이 부추겼다. 그들은 전화나 우편물로 집값 폭락의 위기감을 조장해 헐값에 집을 사들인 뒤 흑인들에게 비싼 값에 되파는 수법이 ‘패닉 페들링(panic peddling, 공포 유포)’이고, 그렇게 지역ㆍ지구 단위로 행해지는 투기가 ‘블록버스팅(blockbusting)’이다. 한 부동산업자는 1971년 한 인터뷰에서 “백인들이 모두 홍콩으로 간다 해도, 떠나주기만 하면 상관없다. 나로선 돈이 전부이고, 돈이 보이면 어디든 간다. 그들이 겁을 먹으면 우리에겐 좋은 비즈니스의 기회가 된다”고 말했다.(chicagoreader.com)

흑인은 부동산 소개업자에게 맨 먼저 찾는 게 직장과 가까운 집이나 새 집(agewise), 싼 집(pricewise)이 아니라 “내가 살 수 있는 동네는 어디냐”는 거였고, 중개업자들도 그런 동네의 집들만 소개했다. 주거통합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그 행태를 ‘레이셜 스티어링(Racial Steering, 인종 유도)’이라 한다.

시카고 시 경계에서 동쪽으로 약 10마일 가량 떨어진 중산층 백인마을 오크파크가 60년대 중ㆍ후반 직면한 상황이 그러했다. 왕복4차선 오스틴 대로(Austin Blouvard) 건너, 즉 시카고와 오크파크 사이의 백인 마을‘오스틴 빌리지’는 이미 급속히‘검어지고’(going black) 있었다. 공부와 일 때문에 객지에 나가 살던 28세의 레이먼드가 고향 오크파크로 귀향한 게, 다들 집 팔고 떠나야 하나마나로 밤잠 설치던 1966년이었다.

로버타 레이먼드(Roberta L. Raymond)는 1938년 11월 16일 교사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8세 때 지역 라디오방송 아역 연기자로 데뷔해 14세 무렵까지 NBC 등 다수의 전국 TV 및 라디오 드라마와 토크쇼 등에 출연했고, 상업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다. 아이오와 주 드레이크대학과 뉴욕 뉴스쿨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시카고의 한 광고대행업체에서 일했고, 이혼 후 아들과 함께 귀향했다.

1960년대 오크파크는 인구 6만 1,093명(1960년 기준) 중 99.6%가 백인인 전형적인 중산층 교외 마을이었다. 근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집과 그가 설계한 문화재급 건축물 10여 채가 있고, 헤밍웨이가 작업실을 둔 적도 있었다고 한다. 오크파크의 첫 흑인은 1950년 이사 든 세계적인 화학자 겸 거물 사업가 퍼시 줄리안(Persy Julian, 1899~1975)이었다. 그래도 흑인이라 한동안 집에 수돗물 공급이 안 됐고, 여러 차례 화염병이 날아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 주민 300여 명이 그의 주거권을 옹호하며 그의 집 잔디밭에서 집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oprhc.org) 오크파크에는 그런 자유ㆍ인권운동의 작은 줄기가 존재했고, 레이먼드 등이 공정주택 운동을 전개할 토대가 됐다. 학부 시절부터 인권ㆍ반차별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는 레이먼드는 금세 지역 시민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성격도 도전적이었지만, 연예 활동으로 쌓은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는 마을 공정주택 조례 제정 운동에 가담하며 시카고 루스벨트대학원에 진학 71년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5월 지인들과 함께 자치의회와 단체, 기업 후원금을 모아 오크파크주택센터(OPHC)를 설립했다. 무료 부동산 소개 서비스를 앞세운 비영리 주민-인종 통합 시민운동 단체였다.

‘센터’가 한 일은 단순했다. 흑인들에겐 백인지역 주택을 우선적으로 소개하고, 백인 전출 희망자에겐 잔류를 설득했다. 자치 당국과 협력해 세금과 주택 개ㆍ보수 지원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공동)주택에 흑인 주민을 수용하게 했다. 물론 그들은 주택 수요자에게 자신들의 취지를 100% 공개했다. 주거지를 유도ㆍ조작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Steering’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소송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레이먼드는 “우리는 Steering하는 게 아니라 Steering을 저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재산과 이권이 걸린 문제였다. 레이먼드와 센터 활동가들은 지저분한 욕설이나 끔찍한 협박과 저주를 받곤 했다고 한다.

부동산 가치 하락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 오크파크 의회는 77년 미국 최초로 일종의 공공보험인 ‘자산가치 보증 플랜’이란 걸 시행했다. 매각 시점 집값이 기준 시가보다 과도하게 하락할 경우 기준가액의 80%까지 차액을 지급한다는 게 골자였다. 그런 일은 없었다.

어쨌건 그런 고단한 과정을 거쳐, 오크파크는 60년대 이후 주거 재분리의 광풍을 극복한 모범 공동체로 부러움을 샀다. 근년의 미국 인구주택 총조사 자료에 따르면 오크파크 인구는 2018년 9월 현재 5만1,989명으로 백인 62.1%, 흑인 21.1%(히스패닉 7.4%, 아시안 4.9%)이며, 가계 평균소득은 시카고(5만400달러)보다 높은 8만2,800달러였다. 1940년대 말 지역 언론이 “여유로운 취미생활의 중심지(hobby centers)”라고 칭송했던 이웃 오스틴 빌리지는 주민(5만6,846명)의 93.1%가 흑인(백인 1.6%)이며, 가계 평균소득도 2만 8,600달러였다. 짐 보워스(Jim Bowers)라는, 오스틴 거주 백인 인권 변호사는 “(두 마을 경계인) 오스틴 대로는 시카고의 베를린 장벽과 다름 없다”고 말했다.

레이먼드는 1996년 사무총장 직에서 물러났고, 지역 주간지(Wednesday Journal)는 16쪽 레이먼드 특집을 기획했다. 그의 후임으로 12년간 센터 사무총장을 지낸 롭 브라이메이어(Rob Breymaier)는 “오크파크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아마 바비일 것”이라고, “오크파크는 그의 헌신 덕에 훨씬 나은 공동체로 변모했다”고 말했다.(chicagotribune.com) 공정주택 문제의 권위자라는 하버드대 게리 오어필드(Gary Orfield) 교수는 “바비는 미국 공정주택 운동의 가장 열정적인 주역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오크파크 전략은 오바마 정부의 재분리 완화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이먼드는 “나는 나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아이였던 때가 없었다. 4, 5세 무렵의 나와 지금의 내가 똑같다. 나는 항상 매사에 진지했고, 모든 것에 관심이 많았다.” 센터 일을 하며 그는 제 뜻을 굽히거나 주도적 역할을 동료에게 넘기는 데 인색해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자신이 쏟은 관심과 열정만큼 세상의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집중되기를 과도하게 바라는 유형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함께 고생한 이들이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일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없잖아 있었다. 당연하게도, 오크파크의 성취는 그가 혼자 이룬 게 아니었다. 원년 마을 이사회 멤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센터 창립 및 운영의 3인방으로 꼽히는 셰를린 라이드(Sherlynn Reid)와 버네트 슐츠(Vernette Schultz, 2009년 작고)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대학서 연극ㆍ연기를 전공한 라이드와 슐츠는 레이먼드의 친구이자 동지로서 저 모든 어려움을 함께 헤쳐냈다. 68년 오크파크로 이주한 흑인 여성 라이드는 흑인 이주자들과의 소통에 크게 기여했고 훗날 주민소통센터 책임자가 돼 건물주협회 등 집단의 상충하는 이해를 도맡아 조정했다. 슐츠 역시 원년 활동가로, 공정주택 운동의 전미 협의체인 ‘오크파크교류협의회(OPEC)’창립을 주도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katiekather.atavist.com) 그들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았다.

고교 시절 펜화를 출품해 ‘전미학업상 National scholastic Award’의 회화부문 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레이먼드는 은퇴 후 수채화 작가로 활동했고, 두 편의 장편 동화를 썼고, 지역 신문에 가드닝 관련 에세이를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그는 두 차례 결혼-이혼했고, 첫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고, 수학자인 세 번째 남편과 해로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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