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프랑스 그랑아르메의 오스트리아 원정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그랑아르메(위대한 군)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저력은 치밀한 병참 계획에 기반한 대규모 원정 능력에 있었다. 그랑아르메가 1807년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프리틀란트(지금의 러시아 프라브딘스크) 전투’를 묘사한 프랑스 화가 호러스 버넷의 회화. 백마를 탄 장군이 당시 프랑스 황제이자 최고사령관 나폴레옹이다. ⓒ위키피디아

1805년 초 나폴레옹은 약 17만 명의 병력을 파드칼레 지역의 불로뉴에 모았다.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공하려는 의도였다. 7월22일, 스페인 북서부의 피니스테레곶 근해에서 전열함 14척의 프랑스함대와 6척의 스페인함대는 15척의 영국함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뚜렷한 승자는 없었지만 프랑스함대를 지휘했던 피에르-찰스 빌뇌브는 전투 후 영국상륙 지원함대가 있는 브레스트로 가지 않고 스페인 남부의 카디즈로 후퇴했다. 8월23일, 영국 침공이 물 건너갔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병력을 행군시켜 오스트리아를 치기로 결심했다. 오스트리아군이 러시아군과 힘을 합치기 전에 오스트리아군 먼저 각개격파로 섬멸하려는 생각이었다.

 ◇17만 대군의 800㎞ 원정 

불로뉴에 있던 프랑스군이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라인강까지 일차로 행군해야 할 거리는 대략 630㎞였다. 이어 라인강에서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까지의 거리가 약 810㎞였다. 나폴레옹 이전의 유럽 군대가 이만한 거리의 원정을 해낸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많아야 3만~4만 명 정도로 병력이 적었다. 즉 약 17만 명의 병력이 이만한 거리를 행군한 전례는 없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나중에 그랑아르메, 즉 ‘위대한 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대규모 원정이 어려운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바로 끼니를 때우는 문제였다. 아무리 정신무장을 시켜도 제때 충분히 먹지 못하는 군대는 쉽게 와해됐다. 허기진 군인은 싸울 의지와 체력이 달리기 마련이었다. 전투 직전에 보유 식량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배불리 먹는 관습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생겨났다. 먹는 게 부실할수록 병에 걸리기도 쉽고 부상이 낫지 않을 가능성도 커졌다. 실제로 전쟁 중 사망하는 군인의 대부분은 전투 중에 죽기보다는 굶주림과 병 때문에 죽었다.

특히 어느 규모를 넘어선 군대를 먹이고 입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군대는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존재였다. 나아가 좁은 지역에 모아 놓으면 어려움이 배가됐다. 그 경우에도 자국 영토 내라면 어떻게 해볼 여지는 있었다. 실제로 당시 프랑스 인구 2,600만 명의 1%에 가까운 그랑아르메는 볼로뉴에 몇 달간 큰 문제 없이 주둔했다.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겠다고 나선 순간 질적으로 다른 난제가 되었다.

 ◇보급? 징발? 늘 어려운 식량조달 

역사적으로 군대의 이동은 언제나 골치거리였다. 군대가 식량을 조달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방법은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19세기 들어 기차가 활용되기 전까지 육상에서 제일 효과적인 수송방법은 말이 끄는 수레였다. 말은 사람보다 훨씬 많은 짐을 나를 수 있었지만 대신 적지 않은 사료를 필요로 했다. 말 자체가 소비하는 사료로 인해 거리가 멀어질수록 운반할 수 있는 식량은 선형적으로 줄었다. 이는 일정 거리보다 먼 곳에는 보급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두 번째 방법은 징발이었다. 징발은 점령지 혹은 제3국에서 필요한 물품을 수취하는 대신 최소한의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행위였다. 지급하는 반대급부가 적정하다면 징발은 효과적인 식량조달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지역 내 주민의 경제력을 넘을 수 없다는 제약이 존재했다. 아무리 10만 명분의 식량을 구하고 싶다 해도 해당 지역의 인구가 1,000명에 지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과업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약탈이었다. 약탈은 주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강제로 물품을 빼앗는 행위였다. 쉽게 말해 강도질이었다. 약탈은 당장의 이익이라는 면으로 징발보다 효율적이었다. 대신 지역이 황폐화되고 주민들이 적대적으로 변했다. 전쟁에 승리하더라도 약탈의 부작용은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켰다. 또 약탈은 군대의 기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번 약탈이라는 무법천지를 경험하고 나면 병사들은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폭도로 돌변하기 쉬웠다. 즉 약탈은 하수인 군인이나 선택할 방법이었다.

 ◇운송선도 보급창고도 없이 

위 제약들을 우회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존재했다. 바로 물의 활용이었다. 물에 뜨는 배를 이용하면 말이 끄는 수레보다 훨씬 더 많은 식량을 운반할 수 있었다. 물의 활용은 보급 관점에서 장점이 많았지만 극복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었다. 즉 물이 없는 곳에서는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역사상 대규모 병력으로 이름 난 원정은 거의 예외 없이 해안가를 따라 이뤄졌다. 내륙이라면 강을 따라 행군이 행해졌다. 강은 무게가 상당한 포를 이동시키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강을 이용하더라도 군대 규모가 너무 커지면 식량 조달은 여전히 어려운 임무였다. 적지 깊숙이 들어간 군대에게 후방 보급은 기대할 수 없는 사치였다. 징발만이 현실적인 대안이었지만 유럽의 일반적인 도시가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은 3만~4만 명 정도가 한계였다. 그마저도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즉 17세기까지 적진에 들어간 군대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행군과 성 포위 공격을 반복해야 하는 가련한 신세였다.

17세기 중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보급창고는 지금까지 언급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다.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장거리 보급이 필요한 지역, 징발은 가능하지만 경제적 수용력이 크지 않은 지역, 그리고 수상 운송이 불가능한 지역에 보급창고를 건설해놓으면 틀림없이 도움이 되었다. 이는 현대적인 물류창고의 원조라 할 만했다.

보급창고도 한계가 없지는 않았다. 현실적으로 보급창고의 건설과 유지는 국경에 가까운 자국 내에서만 가능했다. 국경 근처에서 대규모 방어전을 펼칠 때는 요긴했지만 공세적 작전 시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얘기된 어떤 방법도 그랑아르메가 직면한 상황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의 치밀한 병참 작전 

나폴레옹은 그랑아르메의 행군에 대해 세심하게 계획하고 치밀하게 실행했다. 그에게 병참은 군 최고사령관이 알 필요 없는 하찮은 일이 아니라 가장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우선 개별적 작전 단위인 군단의 병력을 약 2만5,000명으로 정했다. 이는 유럽 도시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규모였다. 또한 8개의 군단이 행군할 경로와 획득할 물량을 따로따로 지정해줬다. 특정 지역에서의 과도한 징발을 예방함과 동시에 길이 붐벼서 행군 속도가 느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으로 너무 호의적인 지역을 오래 지나는 일도 조심해야 했다. 안배에 실패하면 군단 전체가 술에 취해버릴 수 있었다.

9월25일, 약 한 달 못 미쳐 프랑스 횡단을 마친 그랑아르메는 라인강을 넘어 독일 영토로 진격을 개시했다. 오스트리아군의 예상보다 한참 빠른 시점이었다.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조제프와 병참사령관 카를 마크가 지휘하는 독일 방면 오스트리아군은 7만2,000명이었다. 마크는 뮌헨에서 서쪽으로 약 120㎞ 떨어진 울름을 방어의 요충지로 정했다. 조아생 뮈라가 지휘하는 제일 남쪽의 기병군단이 시선을 끄는 사이 그랑아르메 6개 군단은 북쪽으로 크게 우회 기동했다. 10월6일 울름 동북쪽의 도나우뵈르트에 3개 군단이 출몰하자 마크는 뒤늦게 반격에 나섰지만 이미 두 배 이상 병력의 그랑아르메에게 포위된 뒤였다. 10월20일까지 마크를 포함한 6만 명의 오스트리아군이 항복해 포로가 되었다. 남다른 기동력으로써 적 부대를 각개 섬멸하는 그랑아르메의 전술은 이후 수많은 전투에서 승전을 가져왔다.

원정 성공에 비하면 소소하지만, 나폴레옹이 프랑스군의 보급에 기여한 것이 또 있다. 아직 나폴레옹이 초급장교였던 1795년 프랑스 총재정부는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음식 개발에 1만2,000프랑의 상금을 내걸었다. 사실 이는 육군보다는 해군을 위해서였다. 1747년 영국해군의 제임스 린드는 야채나 과일이 괴혈병 예방에 효과가 큼을 확인했지만 1795년이 돼서야 레몬주스 마시기가 영국해군에서 의무화될 정도로 채택에 시간이 걸렸다. 요리사 니콜라 아페르는 1795년부터 다양한 시행착오 끝에 이른바 병조림을 개발했다. 1803년 프랑스해군은 아페르의 병조림을 시험한 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810년 아페르는 최종적으로 상금을 받았다. 아페르에게 상금과 준 사람이 당시 프랑스 황제가 돼있던 나폴레옹이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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