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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한일 갈등과 미국

입력
2019.07.10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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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외무장관(왼쪽)이 1965년 12월 18일 서울에서 한일협정비준서를 일 외상과 교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동원 외무장관(왼쪽)이 1965년 12월 18일 서울에서 한일협정비준서를 일 외상과 교환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일 갈등의 근원인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부산물이다. 미국 주도로 1951년 일본 패전문제 처리를 위해 열린 강화회의는 한반도에 큰 상흔을 남겼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강화조약 2조가 대표적이다. ‘일본이 승인해 줘 한반도 독립이 이뤄졌다’는 미국의 인식에는 한일 병합조약은 합법적이었고 일제 식민지배는 정당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일본이 포기할 지역으로 ‘독도’를 적시하지 않은 것도 현재의 영토 분쟁의 빌미가 됐다.

□ 강화조약 4조는 더 치명적이다. 재산 및 청구권 처리를 ‘일본국과 당사국 간의 특별협정으로 한다’고 규정해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닌, 한국 독립에서 비롯된 채권ㆍ채무관계로 전락시켰다. 이로 인해 14년 동안의 국교정상화 협상 끝에 체결한 한일협정을 통해 받은 ‘무상 3억, 유상 2억달러’의 명목이 ‘배상’은커녕 ‘청구권’도 아닌 일본이 베푼 ‘독립 축하금’ 성격으로 변질됐다. 이승만 정부가 ‘전쟁 배상’을 포기하고 ‘청구권’ 요구로 후퇴하거나, 박정희 정부가 “청구권 말고 다른 이름도 좋다”며 받을 금액에만 매달린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 미국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줄여 준 것은 전후 냉전의 영향이 크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조인한 날 밤 미일이 안보조약을 체결한 것은 상징적이다. 그 바탕에는 태평양 전쟁 전까지 식민지를 보유했던 식민지 종주국들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깔려 있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국익에 따라 일본과의 전략적 제휴를 택했다. 국권이 흔들리던 조선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 조정’ 조항을 믿고 미국과 외교에 총력전을 폈지만 돌아온 것은 가쓰라-태프트 밀약(미일이 필리핀과 조선의 지배권을 상호 승인한 조약)이었다.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 가장 먼저 공사관을 철수한 나라는 고종이 ‘큰형’이라 불렀던 미국이다.

□ 일본의 ‘통상 보복’으로 한일 갈등이 고조되자 미국의 중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냉전 논리와 경제 논리, 자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입각해왔다. 미국 우선주의 원칙에 투철한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대신 우리 손을 들어주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한미동맹은 만능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날 때가 됐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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