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보복’ 사악하고 치밀한 도발 
 한국, 임란 때처럼 사전 징후 무시ㆍ외면 
 외교실책 줄 잇는 무능 외교팀 경질해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9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굳은 표정으로 메모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가증스러운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를 보면서 새삼 우리나라와 일본의 근성 차이나 역사의 반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주변국들에 일본 위정자들은 늘 침략자였다. 자국 내의 모순을 대외 공략으로 풀려고 했다. 반면 ‘사악한 이웃’을 둔 우리 위정자들은 늘 멍청한 초식동물처럼 당하기만 했다. 대책 없이 일본을 얕보고 무시하다 일이 터지고 나서야 뒷발 물린 황소처럼 냅다 머리만 내두른 게 고작이었다.

임진왜란 전야에도 그랬다. 김성한 선생(1919~2010)의 역사소설 ‘임진왜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무리한 조선 출병을 막기 위한 일본 측의 안간힘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특히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으로 먹고살았던 쓰시마도(島)로서는 밥줄이 끊길 위기라서 어떻게든 전쟁을 막으려고 갖은 수를 쓴다. 도요토미는 쓰시마에 조선 왕이 내조해 예를 갖추라는 명을 전하라지만, 조선에선 씨도 안 먹힐 황당한 얘기라는 걸 잘 안다.

결국 쓰시마는 궁리 끝에 가짜 사절단을 꾸린다. 쓰시마에서 그럴듯한 인물들을 모아 도요토미가 일본 통일을 알리기 위해 보내는 공식 사절단인 것처럼 꾸며 조선에 보낸다. 1차 목적은 조선이 답방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토록 해 도요토미로 하여금 조선이 먼저 축하 사절단을 보냈다는 모양새를 만들기 위함이고, 2차 목적은 임박한 전쟁 위험을 조선에 알려 대비토록 해 도요토미의 조선 출병 가능성을 낮추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쓰시마 사절단이 아무리 투정을 부리고 하소연해도 조선 조정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곧 전쟁이 날 것이라고 악을 쓰자 마지못해 통신사를 파견했으나, 도요토미의 인물됨을 가소롭게 평가하고 전쟁 가능성을 일축한 김성일의 주장을 믿고 전쟁에 대비할 여지조차 스스로 없애 버렸다. 끝내 도성마저 버리고 임진강을 건너는 선조는 멀건 시래깃국 한 그릇을 앞에 놓고 회한의 눈물을 뿌리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임진왜란 얘기가 길어진 건 500년 전의 한심한 역사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듯한 참담한 느낌 때문이다. 이번에도 일본의 도발 징후는 진작부터 뚜렷했다. 아소 다로 부총리가 ‘보복 조치’를 공식 언급한 게 3월이었고, 같은 시기 지지통신은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구체적 보복 조치 목록을 작성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정부는 전혀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징후 자체를 애써 외면한 셈이 됐다.

지난해 10월 일제 강제징용 배상 대법원 판결 직후부터 일본은 범정부 차원의 치밀한 보복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1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우리 정부에 대법원 판결 관련 ‘정부 간 협의’를 요청하고 재촉했다. 정부 간 협의는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나,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이전 단계의 협상테이블인 셈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교과서적 입장만 낸 채 협의 요청까지 철저히 묵살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9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협의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대응 방안을 강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전쟁 상대국과도 대화 채널은 열어두는 법이다. 아예 대화를 끊었다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정부가 사전에 경제보복 상황에 대비해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을 분석한 흔적은 없다. 일본이 도발하자 부랴부랴 기업들을 만나느라 분주한 모습은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허둥지둥 병역 대상자 점고에 들어간 500년 전 조선 조정의 모습과 다를 게 별로 없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불과 한 달 전 “한일관계가 최악”이라는 기자의 언급에 “최악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근거를 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식으로 위기 가능성을 외면하는 편의적 현실인식과 감성적 외교정책이 잇단 실책을 부르고 있다. 온 나라가 하나 되어 의연히 대처하자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웃의 사악한 정부를 상대하려면, 우리라도 더는 멍청하지 않도록 외교팀부터 경질해야 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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