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은 내가 스쳐 지나가는 곳이고 공간은 내가 그곳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의미로 맺어져 있지는 않다. 반면 장소는 우리가 그 속에 거하고 있으면서 나의 기억과 현 존재는 물론 미래까지 투사되어 있는 곳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여행지의 도서관에서 파트릭 모디아노의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문학동네, 2014)를 읽었다. 2007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던 이 소설은 2014년 12월 5일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다. 아마도 출판사는 그해 가을에 모디아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나서 출판을 서둘렀을 것이다. 이런 일화에 의례히 따르는 구설은 졸속 번역이지만, 이 책의 번역은 훌륭하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었지만 이 작품을 외면하고 읽지 않았다. 나는 좋아했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 작가와 멀어진다. 마음속으로 ‘당신은 이제부터 나의 보호(애독)가 필요없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컨대 중국 작가 모옌을 무척 좋아했건만,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그와 소원해졌다.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는 196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르 콩데’라는 카페에 모였던 다양한 젊은 단골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모디아노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자발적인 망각’과 ‘기억 찾기’라는 서로 모순되는 주제를 줄거리로 삼아왔는데 이번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화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지우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되새김질한다(독자들에게 조각난 정보를 던져준다). 하지만 원제를 직역한 제목에 명시되어 있듯이,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의 진짜 주인공은 ‘카페’이기도 하다. 서로 관련 없는 주인공들은 ‘르 콩데’가 발산하는 ‘자력(磁力)’에 끌렸다. 모디아노는 서양 작가여서 자력이라는 일종의 과학 용어를 사용했지만, 동양 작가였다면 ‘지기(地氣)’라고 했을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ㆍ지리적 토대는 자신이 맺고 있는 밀착도에 따라 경관(landscape)ㆍ공간(space)ㆍ장소(place)로 구별된다. 먼저 경관은 우리가 여행지에서 ‘경치 참 좋다’라고 말 할 때의 그것으로, 그 속에는 내가 속해 있지 않다. 경관은 내가 스쳐 지나가는 곳이다. 다음으로 공간은 내가 그곳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의미로 맺어져 있지는 않다. 반면 장소는 우리가 그 속에 거하고 있으면서 나의 기억과 현 존재는 물론 미래까지 투사되어 있는 곳이다.

‘장소와 경험’(에코리브르, 2014)을 쓴 제프 말파스는 “우리의 정체성은 특정 장소나 위치에 묶여 있다”면서, 장소야말로 인간의 자아 정체성과 자아 개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과 생애주기는 몇 개의 근본적인 장소와 결부되어 있으며, 우리가 무엇인가 기억을 하거나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할 때 반드시 장소를 불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디아노의 소설 제목이 ‘에투왈 광장’ ‘외곽 순환도로’ ‘슬픈 빌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잃어버린 거리’처럼 장소를 끼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산업화 이전의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장소(고향)’에 살았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고향을 벗어나는 유일한 계기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때 말고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산업화와 세계화는 체계적으로 장소를 파괴하면서 장소 없는 인간을 만든다. 늘어난 비정규직과 일용직은 장소를 갖지 못하게 만들고, 도시재개발과 상승하는 임대료는 우리 주위의 ‘단골 가게’를 하나하나씩 말살한다. 대신 세계화는 ‘공갈 젖꼭지’와 같은 유사 장소를 제공한다. 파리에서 맥도널드 햄버거점을 발견하고, 베이징에서 스타벅스를 만났을 때 온 몸을 감싸주던 안온한 느낌을 떠올려보라. 인터넷 시대는 다국적 기업과 또 다른 유사 장소를 만드는데, 내가 자주 드나들던 사이트가 사라졌을 때 당면한 상실감도 장소 상실과 맞먹는다.

장소가 불편하거나 장소로부터 도주하는 인간도 있다.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의 여주인공 루키가 그랬다. 샹그릴라를 묘사한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을 명함처럼 간직하고 다녔던 그녀는 어머니, 남편, ‘르 콩데’, 연인으로부터 번번이 달아나고 이탈한 끝에 자살을 했다. 야근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홀로 자란 그녀는 애초부터 장소(‘스윗트 홈’이라고 하자)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녀가 열망한 ‘무(無)’를 가리킬 또 다른 명칭이 필요하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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