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동문 매반가(賣飯家)
다산이 전남 강진에 유배 온 뒤 처음 기거했던 사의재. 죄인을 배척한 이곳 주민들로 인해 대문이 부서지는 등 다산이 곤욕을 치를 때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다산이 묵을 수 있도록 내준 오두막집이다. 강진군 제공
◇막막한 어둠

11월 23일, 다산은 혹한 속에 누리령을 넘어 강진 읍내로 들어섰다. 나주 율정에서 형님과 헤어진 뒤 혼자 오는 내내 혹한의 추위 속에 마음이 저미고 뼈가 시렸다. 어느덧 발걸음이 강진현 서문에 들어섰다. 도착 신고를 하려고 관아 문을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싸했다. 다산은 강진 현감 이안묵의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다산 앞에서 먹잇감을 앞에 두고 으르는 범의 여유를 보였다. 너는 이제 내 수중에 떨어졌다, 앞으로 기대해도 좋다는 표정으로 씩 웃는 입꼬리가 서늘했다. 다산은 애써 표정을 흔들지 않았다. 유배객의 거처는 현감이 정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관리와 감시가 쉽게 포교나 아전의 집에 묵을 곳을 붙여주곤 했다. 장기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현감 이안묵은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산은 이를 악물었다.

관아를 벗어나자 숙소부터 정해야 했다.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 초기에 완성한 ‘상례사전(喪禮四箋)’의 서문에서 당시 일을 이렇게 적었다. “또 전전하여 강진으로 귀양 왔다. 강진은 예전 백제의 남쪽 변방이다. 낮고 비루한데다 풍속이 남달랐다. 이 때에 백성이 유배 죄인 보기를 마치 큰 독이라도 되는 듯이 여겨, 가는 데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헐며 달아났다.” 현감의 엄명에 이은 아전의 으름장이 있었던 것이다. ‘사학 죄인을 받아주면 그저 두지 않는다. 알아서들 해라.’

훗날 강진을 떠날 때 쓴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에서도 “처음 왔을 때는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허물며 편히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워낙 타지인에게 배타적인 성향에다, 현감의 노골적인 압력이 더해져 생긴 결과였다. 두 글에 모두 파문괴장(破門壞牆)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재수 없으니 썩 꺼지라는 의미의 적대 행동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매서운 추위 속에 한 집 한 집 더듬어 나가던 다산의 발길이 어느새 읍내를 가로질러 동문까지 이르렀다. 그 너머로 텅 빈 검은 들판이 땅거미를 삼켰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동문 어귀 마을 우물 곁에 과객이 묵어가는 주막을 겸한 허름한 밥집 하나가 있었다. 새벽부터 먼 길을 걸어 추위에 떤 다산이 밥 한 술을 청했다. 노파가 나와 초췌한 그의 행색을 보고는 혀를 찼다. 더운밥을 내왔다. 손을 떨며 허겁지겁 요기를 하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허망하고 적막했다. “예서 하루 묵을 수 있겠는가?” “누추해서.” “고맙네.”

전남 강진군 사의재. 한국일보 자료사진
◇동백꽃이 피었다

하루 이틀 묵어 나가려던 것이, 어찌어찌 해서 다산은 집 뒤란의 봉놋방을 숙소로 정해 눌러앉고 말았다. 앞의 서문이 이렇게 이어진다. “노파 한 사람이 불쌍히 여겨 살게 해 주었다. 이윽고 들창을 가려 막고, 밤낮없이 틀어박혀 혼자 지냈다. 더불어 얘기할 사람도 없었다.” 웃풍이 몰려드는 들창은 아예 종이를 발라서 막고, 다산은 밤이고 낮이고 죽은 사람처럼 골방에 틀어박혀만 있었다.

시 ‘객중서회(客中書懷)’에 당시의 심경이 담겼다.

날리는 눈발처럼 북풍이 날 불어가 北風吹我如飛雪(북풍취아여비설)

남녘의 강진 땅 밥 파는 집 이르렀네. 南抵康津賣飯家(남저강진매반가)

다행히 무너진 산 바다 빛을 막아섰고 幸有殘山遮海色(행유잔산차해색)

좋구나 대나무 숲 푸른 빛을 짓고 있네. 好將叢竹作年華(호장총죽작년화)

장기(瘴氣) 인해 겨울에도 옷을 외려 덜 입는데 衣緣地瘴冬還減(의연지장동환감)

근심 많아 밤이면 술을 자꾸 더 마신다. 酒爲愁多夜更加(주위수다야경가)

나그네 근심을 풀어주는 한 가지는 一事纔能消客慮(일사재능소객려)

섣달 전에 동백이 꽃을 피운 것이라네. 山茶已吐臘前花(산다이토랍전화)

그래도 한때는 임금의 고임을 한껏 받던 내각의 승지였다. 장기보다 번화한 이곳에서 다산은 한층 더 적막했다. 주막 앞쪽의 야트막한 야산이 바다를 가려 막았다. 바다를 보면 형님 계신 흑산도 생각이 떠올라 싫었다. 해풍도 막아주고 그리움도 가려주니 그나마 좋았다. 집 둘레의 대나무 숲은 겨울에도 푸른 잎이 시들지 않았다. 이 모진 추위 속에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가 자신이려니 생각했다. 밟아라. 안 죽는다. 다산은 푸른 댓잎을 보며 오기를 다졌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장기(瘴氣) 때문에 갑갑증이 나서 추워도 두터운 옷을 입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내려올 때 입고 온 단벌뿐이었다. 한밤중 어둠 속에서는 보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함께 허물어졌다. 그때마다 술을 청해 취하게 마시고 나서야 겨우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섣달이 오지도 않았는데 동백이 그 이들이들한 푸른 잎 사이로 붉은 꽃을 피워냈다. 이까짓 시련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다산은 대나무의 푸른 잎과 동백의 붉은 꽃을 보며 삶의 의지와 각오를 다잡았다.

다산은 다시 썼다. “이에 내가 흔연히 혼자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휴가를 얻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사상례(士喪禮)’ 3편과 ‘상복(喪服)’ 1편의 주석을 병행하여 정밀하게 연구하면서 침식을 잊었다.” 유배지의 공부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공부의 첫 단추를 상례(喪禮)와 상복 문제로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는 조상 제사조차 올리지 않는데, 그는 자신의 배교(背敎)에 한 번 더 다짐을 두겠다는 듯이 밤낮 이 연구에 매달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물같이 고인 시간을 주체할 방법이 없었다.

탁희성 화백이 그린 '강진 동문매반가'. 김옥희 수녀 제공
◇강진현감 이안묵

6년 전인 1795년 10월 6일, 당시 정언(正言) 벼슬에 있던 이안묵이 사학의 폐단을 척결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다산은 주문모 실포 사건 이후 금정찰방으로 쫓겨 내려가 있었다. 그중 한 대목이 이랬다.

근래 사학의 폐해는 그 무리가 실로 번성해서 다만 일단의 사족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여항의 하찮은 백성마저 많이들 유혹에 빠져 권솔들을 이끌고서 이를 따릅니다. 호서와 호남에 그 학설이 더욱 성행해서, 혹 수백 집이 있는 큰 마을조차 휩쓸리듯 모두 혹해서 한 통속이 되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아! 이것이 무슨 변고입니까.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저 내버려 두고서 이를 혁파하여 다스릴 방법은 생각지 않습니다. 설령 한두 사람을 외직에 보임하거나 귀양을 보낼 때도 굳이 사설이 성행하는 곳에다 두곤 합니다. 이는 진실로 이른바 섶을 안고 불을 끄겠다는 격이라 하겠습니다. 이 같은 것을 막지 않는다면 온 나라가 장차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땅이 될 것이요, 반드시 무리 지어 일어나 도적이 되는 근심이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시 충청도 금정에 내려가 있던 다산을 겨냥한 말이 분명했다. 그를 사학의 소굴로 보내면 불을 끄기는커녕 오히려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될 것이다. 어째서 이 같은 일을 허용하는가. 이것이 당시 이안목이 다산을 저격한 내용이었다. 이 상소문에서 이안묵은 천주학뿐 아니라 경기도관찰사 서유방 서유린 형제를 아울러 탄핵했다. 당시 정조의 비답은 이랬다.

‘악착스럽고 잔인하고 각박하다. 네 혀가 작살과 같으니, 인인군자(仁人君子)가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들 것이다. 환란이 조금 가라앉자 곧바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 드니 사람됨 또한 잔인하기 짝이 없다. 오늘날 마음을 쏟아 고심하는 것은 다만 풍파를 막아 물결을 가라앉히는 데 있거늘,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조정에서 이미 환히 알고 있는 묵은 혐의와 사적인 유감을 끼고서 때를 틈타 돌을 던지며 못된 짓을 다한단 말인가.’

비답과 함께 정조는 이안묵의 대간직(臺諫職)을 삭탈하고 향리로 쫓아 버렸다. 다산이 강진으로 귀양 오던 1801년에도 정4품의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있던 이안묵은 계속 남을 해치는 상소로 물의를 일으키다, 종 6품으로 강등되어 1801년 7월 22일에 강진 현감에 좌천되어 내려온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산 곁에 정조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한양에서 천리 떨어진 남녘땅의 끝자락이었다. 상소문으로 정조의 격노만 불렀던 6년 뒤, 사방에 적뿐인 다산이 자신의 손아귀 속으로 제 발로 굴러들어왔다. 다산을 굳이 자신의 임지인 강진으로 보낸 것은 자기 선에서 다산을 알아서 처리하라는 공서파의 의중이 있었을 터였다.

현감의 서슬이 워낙 퍼래서 아무도 다산을 상대해주지 않았다. 외가인 해남에서조차 일체의 연락을 끊었다. 다산은 집 소식도 끊어진 채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막막한 1801년이 저물었다.

◇집 소식

해가 바뀌고 한 달을 더 넘긴 2월 초순에야 다산은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석이란 하인이 천리 길을 걸어서 왔다. 이때의 정황은 ‘새해에 집 편지를 받고(新年得家書)’란 시에 자세하다. 시 인용은 생략하고, 그 내용만 간추리면 이렇다.

해가 바뀌고 봄이 왔다. 닫힌 방문 안에서만 있느라 봄이 온 줄을 몰랐다. 동백숲을 돌며 즉즉 찢어지는 울음을 울던 직박구리의 목청이 매끄러워진 것을 문득 깨닫고서야 봄이 온 것을 알았다. 방문은 늘 닫힌 채였고, 이불조차 갤 필요가 없는 날들이었다. 자식들은 아버지 건강을 염려해서 의서(醫書)를 베껴 써서 보내왔다. 편지를 건넨 어린 하인 녀석이 다산의 거처와 행색을 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와 함께 아내는 새 옷을 짓고 평소 좋아하던 붉은 찰밥을 싸서 보냈다. 편지에는 쇠투호를 팔아서 양식과 바꿨다는 사연이 적혀있었다. 살림살이가 여간 팍팍하지 않을 터였다. 다산은 할 말이 없어서, 뽕나무를 수백 그루 심어서 살림에 보태라는 되지도 않을 얘기만 쓰고 말았다.

하인 석이는 2, 3일을 쉬고 2월 7일에 강진을 떠났다. 그 인편에 다산은 아들에게 당부의 편지를 썼다.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뜻을 지극히 하고 힘을 부지런히 쏟아 책을 읽고, 책을 베끼고, 글을 지어야 한다. 허투루 시간을 보내면 못 쓴다. 폐족(廢族)으로 글을 못하고 예법도 없다면 더더구나 어찌 견디겠니. 보통 사람보다 백 배의 노력을 더해야 간신히 사람 축에 낄 수가 있을 게다. 내 고생이 몹시 심하다만, 너희가 능히 책을 읽고 몸가짐을 삼간다는 말을 듣는다면 아무 근심이 없겠다.”

석이가 떠나자 마음이 한층 더 헛헛했다. 다산은 큰 아들 학연에게 4월 10일쯤 강진에 내려오라고 당부했다. 열흘 뒤인 2월 17일, 다른 인편을 얻자 “절대로 과거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저 물러 앉지 말고, 부지런히 경전을 익혀야 한다.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내가 입은 옷은 지난해 10월 1일에 입은 것이다. 어찌 견딜 수 있겠느냐?”라는 편지를 한번 더 써 보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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