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나영 로얄리비안 인터내셔널의 비즈니스 코디네이터
중국 상하이에서 일하는 김나영(34)씨의 삶은 자수성가한 한국인의 표본 같다. 지방 야간대학 출신의 스펙 제로였지만 우연과 노력이 겹쳐 10년만에 글로벌 기업에서 꽤 중요한 중역이 됐다. 김씨의 직장은 크루즈 회사. 2009년 로얄캐리비안 인터내셔널에 크루즈 승무원으로 취직한 그는 이제 같은 회사에서 기항지 개발, 비자 협약, 국제행사 등을 총괄하는 비즈니스 코디네이터로 활동한다. 올 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당신들의 기준은 사양하겠습니다(와이즈맵 발행)’를 냈다. 최근 휴가 차 서울 이태원을 찾은 김씨는 “세상 기준대로 살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빚쟁이들에 쫓겨 1년에 한두 번씩 이사를 다니고, 용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창시절 김씨는 꿈이 없는 학생이었다. 김씨는 “공부가 싫어 학교 빠져나갈 방법을 구하다 무작정 찾아간 외국어학원에서 우연히 중국어를 배우게 됐다”고 했다. 학교서 칭찬을 들으면서 삶에 목표가 생겼다. 어렵사리 부산외대 중국어과 야간에 입학하게 됐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 7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9년 연애하고 결혼한 남편이 책 읽고 많이 울었대요. 대학 때 너무 어려워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하면서 헤어지자고 한 적 있거든요. 그때 저 달래면서 관련 정보 알아봐준 속 깊은 사람인데도 제 고생을 이렇게 구구절절 알게 된 건 처음이에요.”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면서 일주일에 이틀 아르바이트를 쉴 수 있었다. 이전보다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성적장학금을 받는 ‘선순환’이 이뤄지던 찰나, 학교에서 베이징 교환학생 제도를 시작했고 첫 유학생으로 김씨가 뽑혔다. 김씨 어머니는 새벽 요구르트 배달을 시작하면서 유학을 뒷바라지 했다.
크루즈 선원에 도전하게 된 건 그 시절 만난 이탈리아 친구의 영향이 컸다. 교환학생으로 처음 한반도 밖의 땅을 밟아봤다는 김씨에게 친구는 세계 각국의 여행 사진을 보여줬고, 그 중 크루즈 여행 사진도 있었다. 김씨는 “고향이 부산이라 배를 많이 봤는데도 레스토랑, 객실, 수영장에 카지노까지 갖춘, 수천 명을 수용하는 배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은 넓고 그 중 1%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와 크루즈 회사 관련 정보를 찾았다. 한국인 승무원이 드물던 그 시절 관련 정보는 모두 영어였고, 중국어로 외국어 공부에 자신감이 붙은 김씨는 취업을 준비하며 자연스럽게 영어공부에 매달렸다. 크루즈 회사들은 대개 ‘경력자’만 뽑았는데, 학비를 벌기 위해 했던 각종 서빙 아르바이트가 경력으로 인정됐고 면접까지 통과, 레스토랑 보조 웨이터로 승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김나영씨는 “제가 근무한 로얄캐리비안 인터내셔널 직원이 3만명인데 그 중 한국인은 저 포함 5명이었다”며 “10년간 숫자가 조금씩 늘어 40명 가량된다”고 말했다.
김씨가 수습 기간 근무한 크루즈는 6개월 간 세계 곳곳을 항해하며 짧게는 닷새, 길게는 보름 주기로 새 승객을 맞아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동아시아 지역을 지나던 무렵 승객 대부분이 중국인으로 바뀌었고, 이들은 한국과 일본을 여행했다. 영어와 중국어를 구사하는 한국인이 배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승객 서비스 팀장은 김씨에게 사무직 근무를 제안했다. “신입 사원이 최고경영자 눈에 띄어 하루아침에 승진하게 된 그런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셈이다. “보조 웨이터가 사무관으로 직책 바뀌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저를 ‘운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죠. 그런데 저는 세상에 인과관계가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믿습니다.” 김씨는 쉬는 시간마다 휴게실, 도서관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부서 승무원들과 안면을 트고 그들 업무에 관심을 보였다. 배가 중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인 룸메이트와 일주일에 세 번씩 회화연습을 하며 손님맞이 준비를 했다. 그리고 크루즈 안에 중국어 구사가 가능한 한국인 직원이 있다는 걸 적극 알렸다. 사무직으로 옮겨 고객서비스 사무장, 하선 담당 사무장, 스위트룸 전문 사무장을 차례로 맡은 김씨는 한국 여행사를 거쳐 2015년부터 지금의 회사에 재입사해 상하이에서 근무하고 있다.
김씨가 책을 쓰게 된 계기는 크루즈 승무원을 꿈꾸는 학생들의 취업 상담을 하면서부터다. 김씨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 크루즈 승무원의 ‘스펙’을 물어보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 김씨는 “처음에는 이메일로 답장을 쓰다가 너무 많아져 일일이 답장을 못할 정도가 됐다. 크루즈 회사 관련 정보를 카카오 브런치에 연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음 꿈은 ‘한국 크루즈 승무원 협회’를 만드는 거란다. 지난해 승무원 모임을 발족해 이미 정관도 만들었다.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업계 정보, 권역별 문화 다양성, 조직 문화를 소개할 계획이다. 김씨는 “외국계 회사, 크루즈 승무원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입사했다가 실망하고 그만두는 분들도 있다. 크루즈 업계 정보는 물론, 사람과 조직을 존중하는 태도를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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