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나 좌절의 감정적인 바탕에, 또 원한이나 분노, 배신감이나 복수심의 열정이 세월 속에 식고 잔잔해져 마침내 가라앉은 앙금 속에, 과연 질투의 비중은 얼마쯤 될까. 그 문제를 오래 생각한 이들의 대체적인 생각은 절대적이라는 거였다. 시인 기형도가 ‘질투는 나의 힘’에서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 뿐”이었다고 고백한 것은 “가진 것이라고는 탄식 밖에 없”던 20대 무렵이었지만,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의 늙은 주인공이 긴 세월 동안 친구의 귀환을 기다린 까닭과 그렇게 버틴 힘의 뼈대는 그가 아내와 저지른 불륜에 대한 복수심이었고, 그 복수심의 바탕에 있던 것은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은 친구를 향한 질투였다. 경험한 삶이 아니고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고 쓸 수도 없다고 공언해온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소설 속, 작가 자신이라 해도 좋을 여러 인물들의 뜨거운 연애(성애)들이 그리 탐스럽지 않은 까닭, 또 그 절정의 자리에서조차 앞질러 상실을 기억처럼 예감하게 하는 까닭도 ‘단순한 열정’이 결코 한시도 단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집착이라는 지옥과 의심이라는 이름의 형벌이 스스로 질투를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사실 질투는 그들의 힘이기도 했다.
동서양 역사 안에서 특히 왕권을 둘러싼 혈육의 쟁투와 가신들의 유혈극을 동반한 권력 투쟁의 바닥도 질투의 뼈들이 산을 이룬다.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메리 1세(1516~1558)가 ‘피의 메리 (Bloody Mary)’가 된 까닭으로는 종교개혁에 뒤이은 격렬한 종교세력 간 갈등과 정통의 튜더 혈통에 대한 귀족ㆍ가신들의 집착이 표면적 이유로 꼽히지만, 그 바탕에는 정떨어진 본처 자식에 대한 아버지 헨리 8세의 냉담함과 왕권을 물려받은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6세에 대한 질투가 서려 있었다. 앞서 헨리 8세는 수장령으로 가톨릭을 등지면서 메리의 친모 캐서린과 이혼했고, 메리는 가톨릭 신앙을 어머니의 유산처럼 간직했다. 에드워드 6세는 국교도인 사촌 누이 제인 그레이(1537~1554)에게 왕권을 넘겼다.
엄밀히 따져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인 제인 그레이는 재위 9일 만인 1553년 7월 19일 메리 1세에 의해 폐위돼 이듬해 2월 12일 런던탑에서 참수당했다. 물론 질투는 극히 사적인 것이어서 다만 문학이나 예술에 기댈 뿐 정사(正史)에 끼어들진 못한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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