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통신 37년, 추억의 기기들 
삼성전자가 출시했던 무선호출기 '애니삐' SRP-6100N. 출처 삼성전자 홈페이지

‘17171771, 1010235, 8253….’

암호인지 수학 답안지인지 모를 이 숫자들은 1990년대 초 ‘삐삐’로 불리는 무선호출기 이용자들이 한 번쯤은 찍어봤을 숫자다. 17171771은 뒤집으면 영어로 ‘I LUV U’로 보인다고 해 ‘사랑한다’, 1010235는 10을 열로 발음해 ‘열렬히(10102) 사모(35)’, 8253은 ‘빨리 오라(빨리오삼)’를 뜻한다. 10자리 정도의 번호만 표시되는 삐삐의 기능 안에 자신의 생각이나 하고 싶은 말을 숫자로 표시한 일종의 문자메시지인 셈이다.

무선호출기는 1982년 국내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누군가 전화로 호출기 번호를 누르면 ‘삐삐삐’하고 소리가 울려 ‘삐삐’로 불렸다. 1993년부터 보편화되기 시작, 1997년에는 가입자가 1,500만명을 돌파할 정도로 늘었다. 이를 두고 무선 이동통신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 수요가 세계 수준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무선호출기 이용자 수는 2세대(2G) 개인휴대통신(PCS) 등이 등장하면서 이후 300만명으로 급감했다. 2000년에는 45만명으로 떨어졌고, 2009년 호출기 통신사인 리얼텔레콤이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주인공 윤윤제(배우 서인국)가 집 전화로 무선호출기에 저장된 음성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다. tvN 홈페이지 캡쳐

삐삐는 그나마 장수한 기기다. 공중전화 기지국을 이용해 생긴 시티폰은 출시 2년 만에 자취를 감췄다. 1997년 KT가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제한된 구역에서 발신만 할 수 있어 변형된 공중전화에 불과한데다 2G 휴대폰과 PCS가 대중화되면서 인기를 끌지 못했다.

통신망을 이용한 국내 이동통신의 역사는 1984년 자동차에 안테나를 달고 벽돌만한 전화기를 연결한 카폰이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카폰은 차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기 가격이 400만원 정도로, 당시 포니 자동차(300만원가량) 보다 비쌌다.

카폰으로 시작한 국내 휴대폰 역사는 35년에 불과하지만 기술 개발의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시티폰처럼 많은 기기들이 서랍 속으로 속속 사라졌다. 더구나 통신사와 제조사들의 판매 경쟁도 치열해져 소비자들이 휴대전화의 기능을 다 써보기도 전에 멀쩡한 기계를 버리는 실정이었다.

아무런 불편 없이 쓰고 있는데도 가입자가 줄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비스를 중단해 이용자들의 반발을 살 때도 있었다. 무선호출기 이용자들은 지난 2009년 리얼텔레콤이 파산하자 가입자들이 반대 청원 서명을 받으며 서비스 종료를 막는데 나서기도 했다. ‘삐삐’의 울림은 멈췄지만, 포털사이트 다음 등에는 아직도 카페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삐사모)’가 운영되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글들이 올라고 있다.

삐사모 운영자 강동욱씨는 “2004년 휴대전화를 산 뒤에도 서비스 종료 직전까지 삐삐를 버리지 못했다”며 “많은 사람이 사용했는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지금까지도 많이 아쉽다”고 말했다.

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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