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자금 회수해도 문제 없어”… 국내 은행ㆍ기업 유동성 상황 주시
우리나라에 풀린 일본계 은행 자금이 18조원에 이르는 상황에서 일본의 다음 경제 보복 조치가 ‘금융 보복’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본계 은행들이 우리 금융기관이나 기업에 대한 대출을 빠른 속도로 회수하며 금융 경색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인데, 실제 일본은 이번 수출 규제에 앞서 금융 보복을 우선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당국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면서도 “설령 일본이 금융 보복에 나서도 큰 영향은 없을 것”이란 입장이다.
◇“금융 보복은 일본의 우선 검토 카드”
7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미쓰비시파이낸셜그룹(MUFG), 미쓰이스미토모(SMBC), 미즈호(MIZUHO), 야마구찌(Yamaguchi) 등 4개 일본계 은행의 국내 총여신액은 18조2,994억원이다. 은행별 대출액은 미즈호가 8조2,383억원으로 가장 많고, 이어 미쓰비시파이낸셜(5조7,551억원), 미쓰이스미토모(4조2,172억원), 야마구찌(888억원) 순이다.
일본계 은행의 국내 여신 규모는 외국계 은행 총여신액(74조3,100억)의 약 24%로, 중국계 은행(34%)에 이어 두 번째다. 일본은 2016년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는 등 통화 완화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터라, 국내에서 일본계 은행은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외화를 조달할 수 있는 창구로 인식되고 있다.
문제는 일본계 은행들이 자국의 경제 보복 조치에 동참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 정통한 전직 고위 관료는 “일본이 지난해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일본계 은행의 한국 여신을 활용하는 방안을 우선적으로 검토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일본의 단기대출 만기연장 거부로 위기가 증폭된 경험도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은행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강한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라며 “당장 대출자금 대부분을 회수할 수는 없겠지만 금융 보복 가능성은 열려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일본계 은행의 국내 여신이 최근 대폭 줄어든 것도 심상찮은 대목이다. 지난해 9월 말 21조815억원에 달했던 여신액은 지난해 12월 말 19조5,195억, 올해 3월 말 18조2,994억원으로 줄었다. 반년 만에 3조원에 가까운 대출액이 회수된 셈이다.
시장에선 일본이 미중 무역분쟁 장기화에 대응해 고위험 국가나 신흥국 투자를 줄여나가는 추세라고 분석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저금리 기조를 앞세워 외국 투자를 늘려오던 일본이 최근 1, 2년 새 리스크 관리에 들어가는 모양새”라며 “특히 한국은 미중 무역분쟁의 직접적 타격을 입는 국가라 대출을 줄일 유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일본계 은행들의 기조에 정부의 보복 정책까지 가세할 경우 여신 축소가 가파른 속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금융당국 “다른 데서 빌리면 된다”
일본이 금융 보복에 나선다 해도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거란 관측도 적지 않다. 한국의 국가신용도, 글로벌 저금리 상황 등을 감안하면 일본계 은행들이 대출 연장이나 신규 대출을 거부하더라도 다른 조달처를 이용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국내 기업 중 상당수는 단지 일본계 은행의 대출금리가 싸다는 이유로 이용하고 있다”며 “당장 일본계 은행에게 돈을 갚아야 한다면 국내외 다른 금융사를 찾아 대출하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비슷한 입장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2008년 금융위기 때와 달리 우리나라 거시경제와 금융시장이 안정돼 있어 일본이 돈을 안 빌려줘도 얼마든지 다른 데서 돈을 빌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식ㆍ채권시장에서 일본 투자 자금이 회수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투자 규모를 고려할 때)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5월 말 기준 일본계 자금이 보유한 국내 상장주식 가치는 12조가량으로, 전체 외국계 자금의 2.3% 수준이다.
금융당국은 그럼에도 이달 초부터 실무회의를 열고 이번 한일 갈등 국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를 마련해 대책을 점검하고 있다. 당국은 대출이나 채권 발행을 통해 일본계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국내 은행이나 기업의 유동성 상황도 주시하고 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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