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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평화와 번영

입력
2019.07.06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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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위에 1953년생 소나무 공동식수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위에 1953년생 소나무 공동식수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평화의 사전상 정의는 평온하고 화목함이다. 평온이란 조용하고 평안하다는 뜻이다. 화목이란 서로 마음이 맞고 정답다는 뜻이다. 따라서 평화란 스스로는 걱정이나 염려할 일이 없으며, 다른 이와는 갈등이나 마찰을 빚지 않는 것이다.

평화는 눈부신 햇살과 함께 잠에서 깨었을 때 아무런 근심이 없는 것이다.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녹슨 수도관에서 흘러나오는 오염된 물에 불편을 겪지 않으며, 길에 나섰을 때 낯선 사람으로부터 이유 없는 모욕을 듣지 않는 것이다. 농민들이 제값에 못 미치는 농산물 가격 때문에 한숨 쉴 일이 없고, 여성들이 화장실을 이용할 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이유가 없다. 법원의 판결을 믿고 자회사 전환을 거절한 수납원에게 그날 아침 해고 통보가 떨어지는 일이 없다.

평화는 다툼이 없이 조화로운 삶이다. 정치인은 뉴스에 얼굴을 내비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으며, 경영인은 국가 간 외교 마찰에 따른 무역전쟁에 머리를 싸매지 않는다. 자영업자는 갑자기 두 배, 세 배로 오른 임대 월세로 인해 파산할 걱정을 하지 않는다. 직원은 오늘도 무례한 고객의 트집으로 상처 입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십 년간 공동체를 이루며 노량진 수산시장을 일궈온 상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철거반원에게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평화는 소란스럽지 않고 고요한 것이다. 산불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이 국회 파행 때문에 미뤄진 복구사업을 재촉하러 비를 맞으며 상경 시위에 나서거나, 휴대폰 케이스를 생산하던 여성들이 공장 폐쇄에 반대하며 일터를 점거하지 않아도, 모든 일이 공정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사망 후 여덟 시간이나 방치되었던 어린 석탄노동자의 어머니가 목이 쉬도록 절규하지 않아도 산업현장의 안전수칙이 규정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매년 2,000명이 넘는 죽음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사전에 따르면 번영은 번성하고 영화롭게 된다는 뜻이다. 번성은 한창 성하게 일어나 퍼진다는 뜻이다. 영화는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빛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번성이란 누구라도 성실히 일한 대가를 돌려받으며, 각자가 가진 재능이 세상의 쓰임을 받는 것이다.

번영은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 하루의 삶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보육원 순번에서 밀려 저녁까지 홀로 있을 아이를 걱정하여 걸음을 서두를 필요가 없이, 가족과 함께할 저녁식사를 위해 좋은 음식을 고르는 것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사람은 직장의 푸념을 늘어놓지 않고도 풍성한 화젯거리에 즐거워하며, 반상회에 참석한 사람은 아파트 값 이야기 대신 꽃밭을 함께 가꾸자는 계획을 말한다. 자신의 밝은 미래를 낙관할 수 있으므로 학생은 성적압박에 목숨을 끊는 일이 없다.

번영은 얼굴 가득 피어나는 미소다.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연인이 빚을 지지 않고도 둘만의 보금자리를 얻는다. 육아로 일을 쉬었던 사람은 원래 직장에 순조롭게 돌아가고, 반가운 동료들이 그(녀)의 복귀에 기뻐한다. 오랜 기간 일하다 퇴직하는 사람이 존경과 감사를 받으며 그동안 미뤄 두었던 여유를 누린다. 저작권료를 도둑질당할 염려가 없는 음악가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십 년 이상 노숙하며 부당해고에 항의하던 기타 제작자가 다시 섬세한 손길로 악기를 만든다.

번영은 가난한 사람의 존엄이 빛나는 것이다. 청소노동자가 남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대신 충분한 식사시간과 질 좋은 음식을 제공받는 것이다. 연락도 닿지 않는 친척의 존재 때문에 생계지원을 받지 못하는 노인과 장애인이 없는 것이다. 정직원과 똑같이 일하는 파견노동자가 더 낮은 대우를 받지 않으며, 정당한 연차를 요구했다가 욕설을 듣지 않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청년이 홀어머니를 위한 깜짝 선물을 안고 포근한 집에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와 번영이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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