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월 휴가 떠난 엔자임헬스 직원들 
한달 휴가를 보낸 체험기를 책으로 쓴 엔자임헬스 대표와 직원들. 왼쪽부터 이현선 이사, 김세경 상무, 김지연 팀장, 김동석 대표, 이지수 상무, 고성수 대리, 백목련 대리. 홍윤기 인턴기자

이제는 고전이 돼버린 ‘직장인 3·6·9법칙’이 국내 본격적으로 회자된 건 약 10년 전이다. 입사 3개월, 6개월, 9개월째 심한 스트레스와 회의감을 느끼고, 이 회의감을 제때 관리하지 않으면 입사 3년, 6년, 9년 즈음 퇴사와 이직을 고민하게 되는 현상. 헬스 관련 홍보 마케팅 회사 엔자임헬스는 이 법칙이 적용되는 3년마다 한 달의 ‘안식휴가’를 준다. 2009년 시작한 안식월을 직원들은 10년간 64번, 1,920일간 썼다. 누구는 요즘 유행한다는 ‘제주도 한 달 살기’에, 누구는 체지방 20% 만들기에 도전했다. 대다수는 해외여행을 떠났다. 최근 이 체험담을 엮어 직원들 스스로 ‘직장인 한 달 휴가-두 번째 이야기’란 책을 펴냈다. 첫 책은 2017년에 나왔다.

최근 서울 정동 엔자임헬스 사무실에서 만난 직원들은 하나같이 “안식월은 회사의 조직문화와 복지 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제도”라고 말했다. 안식월에 ‘3개국 테마여행(필리핀, 베트남, 일본)’을 다녀온 이지수 마케팅본부 상무는 “(오래 근속하는데) 안식월이 큰 역할을 했다. 번아웃이 될 때 쯤 안식월이 찾아오는데, 한 달을 쉬면 방전된 배터리가 충전되듯 재충전하게 된다”고 말했다.

제도를 시행한지 10년이 지나면서 두세번씩 안식월을 사용하는 직원이 나왔고, 안식월을 알차게 보내는 요령도 생겼다. 세 번째 안식월에 ‘제주 한달 살기’에 도전한 김세경 PR본부 상무는 “(안식월) 1년 전부터 제주살이를 준비했다. 준비하는 시간을 즐기는 것”이라며 “내년 4번째 안식월을 맞는데 벌써 계획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빵 동호회’에 가입할 정도로 빵을 좋아하는 김지연 헬스케어 PR본부 팀장은 두 번째 안식월에 독일과 체코로 빵지순례(빵집과 성지순례의 합성어로 유명 빵집을 직접 찾는 것)를 떠났다. 김 팀장은 “첫 안식월에 갑자기 주어진 한 달을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이 시간을 어떻게든 꽉꽉 담자는 부담에 발이 아프도록 돌아다니고, 돌아와서는 아쉬워 눈을 끔벅였다. 이번 안식월은 여유있게 시간을 보내고, 제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은 걸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빵지순례였다”고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주인공처럼 그때 그 시절 고마웠던 지인에게 일일이 인사하는데 시간을 보낸 이도 있다. 백목련 크리에이티브본부 대리는 남편과 자신의 오작교가 돼준 친구들에게 정성 어린 음식을 대접하고, 첫 직장 사수에게 와인을 선물하고, 고교시절 1년 반을 보낸 부산의 동창을 만나고, 암 투병 중인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 백씨는 “제 업무는 디자인이라 글쓰기를 업으로 삼지 않는다. 제 인생에 책 저자가 될 일이 없을 것 같아 회사에서 이번 책 필자를 모집한다고 할 때 얼른 지원했다”고 말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만큼 안식월 기간 새로운 관계 맺기도 시작된다. 첫 안식월에 스위스 배낭여행을 떠난 고성수 공익마케팅본부 대리는 “그곳에서 새 친구들을 만나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이번에 책 필자로 참여하게 된 것도 그 친구들의 권유 덕분인데, 책에 친구들 얘기를 많이 썼더니 ‘우리 덕에 책 썼으니 밥 사라’고 하더라. 원고료보다 밥값이 더 나갔다”고 멋쩍게 웃었다.

김동석(맨 오른쪽) 엔자임헬스 대표는 재작년 런던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그 기간 부대표와 본부장들이 대표의 업무를 나눠 맡았고, 그 해 성과는 더 올라갔다. 내년에는 부대표가 안식년을 쓴다. 홍윤기 인턴기자

엔자임헬스의 안식월은 유급이다. 직장인들이 환호성을 지를만하지만, 이 제도를 운영하며 회사가 추가 부담하는 비용은 없다. 요컨대 직원이 안식월을 쓰면 팀원들이 한 달 간 그 업무를 나눠 맡는다. 업무가 정상적으로 배분되는 회사라면 어떤 업종에서도 도입 가능하다. 김세경 상무는 “우리 회사에는 옆 사람이 휴가를 가야 내가 휴가를 갈 수 있다는 게 기본 마인드셋(마음가짐)”이라며 “제도를 10년간 운영하며 (안식월 기간) 업무를 누가 어떻게 맡을지 조율하는 방법이 체계화돼있다”고 말했다.

2009년 안식월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김동석 대표였다. 회사를 공동대표로 운영하다가 혼자 대표직을 맡게 된 게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저녁 6시무렵 광화문 사거리에 갔는데 샐러리맨들이 막 퇴근해 엄청 붐볐다. 정시퇴근, 저희 직원들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당시에는 회사 키우기에만 급급했다”고 말했다. 안식월 제도를 시행하겠다고 하자 직원들이 먼저 걱정하고 나섰다. 고객사를 대하는 업무 특성상 한 사람이 빠지면 다른 직원이 일을 대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단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인사관리 담당자인 이현선 기획관리본부 이사는 “가능하다”고 봤다. “품앗이 개념이니까 빈자리를 팀원들이 제대로만 채워주면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선례가 나와야 제도가 운영된다고 생각해서 계속 독려 메일을 보냈죠.”

안식월 제도를 10년간 운영하며 노하우도 생겼다. 회사는 매년 초 대상자 명단을 발표한다. 해당자가 안식월 계획을 세우면 9개 본부의 각 본부장이 업무를 조율한다. 김 대표는 “우리처럼 작은 규모의 회사도 안식월을 운영한다는 것을 (책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면서 “작은 회사가 가능하다면 큰 회사는 더 짜임새 있게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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