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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의 그루밍 성범죄 배상 판결 다른 사건 승소에 디딤돌 되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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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의 그루밍 성범죄 배상 판결 다른 사건 승소에 디딤돌 되어야죠”

입력
2019.07.03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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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법무법인 종로’ 사무실에서 만난 임주환 변호사가 그루밍 성폭력 승소 판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법무법인 종로’ 사무실에서 만난 임주환 변호사가 그루밍 성폭력 승소 판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안 그래도 상대편에선 ‘미투(me too) 때문에 이런 재판이 이뤄진 거다’라고 비아냥대더군요. 예, 어떻게 보면 맞습니다. 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 감수성이 높아지니까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는 거지요. 이런 판례들이 쌓이면서 세상의 변화에 법원이 한 걸음씩 맞춰 나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번 판결이 다른 사건의 ‘디딤돌’이란 점이 부각됐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법무법인 종로’ 사무실에서 마주한 임주환(45) 변호사의 소회다. 임 변호사는 최근 유명 심리상담사 A씨의 그루밍(Grooming) 성범죄 사건에 대해 1,500만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루밍 성범죄란 상대를 길들여 심리적인 의존상태로 만든 뒤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뜻한다. 정신상담 과정에서도 자주 발생하는데, 정신상담의 특수성 때문에 바깥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을뿐더러, 법적 처벌도 쉽지 않다. 형사 처벌이 안되니 손해배상도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한국일보 기획특집 "상담실의 악마. 그루밍 성폭력")

임 변호사가 맡은 사건이 그랬다. 의뢰인인 B씨는 2016년 2월 A씨를 고소했다. 정신상담 과정에서 A씨와 성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A씨가 다른 내담자와 함께 촬영한 성관계 영상을 자신에게 보여줬다는 이유에서다.

[저작권 한국일보] 김문중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김문중 기자

형사소송은 예상대로 난관을 겪었다. 2009년 교회 노회장이 여신도를 성폭행한 사건에 준강간 혐의를 적용한 대법원 판례까지 찾아서 들이밀었지만, 검찰은 끝내 “B씨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했다. 임 변호사는 “검찰도 A씨 죄질 자체는 상당히 나쁘다고 봤지만 준강간의 ‘항거불능’을 음주나 정신적 장애 등으로 좁게 해석한 판례 때문에 기소해봤자 유죄를 받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미투 이전’이라 전향적인 판단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임 변호사는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로 방향을 틀었다. 준강간 혐의로 형사 고소한 것이 도움이 되긴 했다. 수사자료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임 변호사는 이 자료를 토대로 B씨가 상담사인 A씨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A씨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역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법원 판결은 고무적이었다.

지난달 12일 서울북부지법 민사항소4부(부장 강재철)는 A씨에 대해 상담사의 보호의무를 어긴 것이니 불법행위일 뿐 아니라, 상담사와 내담자 간 계약을 위반한 채무불이행에도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윤 변호사가 기뻤던 건 판결 결과뿐 아니라 내용이었다. “그루밍 성범죄 사건에서 상담사와 내담자 사이의 특수 관계를 섬세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 자세히 담긴, 상징적인 판결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상담사의 본분을 어겼다’는 식의 일반적인 설명 대신 “상담사는 자신의 개인적 욕구보다 상담가로서의 역할 수행을 우선시해야 하며, 내담자가 애정을 보이더라도 진정한 대상이 자신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고 밝혀뒀다. 특히 ‘상담치료가 끝난 뒤 성관계를 맺었으니 상담사로서의 보호의무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상담치료로 인한 의존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이상, 보호의무가 종료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법정에서 이 논쟁을 하고 있는데 판사 중 한 분이 ‘내가 재판 뒤 사석에서 원고나 피고를 따로 만나 어울린다 해도, 그 관계가 과연 친구겠느냐’고 되묻더군요.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입니다.”

임 변호사가 ‘디딤돌’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루밍 성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다양한 입법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그보다 법원이 더 적극적인 해석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입법도 좋지만, 입법이 모든 걸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섬세한 판례가 하나 둘씩 쌓이면서 법의 사각지대가 점점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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