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수목원에 보관된 윌슨의 채집노트

한동안 버리기가 큰 숙제였습니다. 개인적으론 집도 사무실도 이사를 해야 했으며 영원할 것 같았던 직장도 잘 마무리해야 해야 하는 날들이 아주 멀지 않게 다가오면서, 잘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많았습니다. 구태여 간직하지 않아도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보고 또 보며 골라내었지요. 저와 동시대를 사신 분들은 비슷하겠지만 쓸 만한 것들을 버리는 일들은 잘못처럼 느껴져 더 어려웠습니다. 집안에서 쓰는 물건들은 새것에 가까운 것들을 기부하는 곳과 후원금은 좀 내야 하지만 쓰던 옷가지들을 받아 어려운 나라에 보내주는 좋은 단체들이 있어서 쓸 수 있는 것을 버리는 죄책감에서는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평생 끼고 있던 책들도 꼭 언젠가는 펼쳐볼 것 같아 한없이 쌓여가고 있었는데, 언제나 보는 책, 저자와 인연을 가진 책, 구해보기 어려운 책들을 빼고는 도서실에 기증했습니다. 수목원 도서실에 여러 권씩 있는 잉여의 책들은 방문자 센터에서 꽂아두고 필요한 누구든 가져가는 대신 성의껏 모금을 해주면 그 금액으로 어려운 시설의 아이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책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풀었습니다. 이 일은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윌슨의 한국에서 채집당시의 사진

버리는 일에 열중할 즈음, 미국 하버드대학 부설 아놀드수목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우리나라의 특산나무인 구상나무를 세상에 알린 윌슨(Wilson)의 기록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구상나무는 윌슨이 1917년 한라산 자생지를 찾아 표본을 채집하고 1920년 신종기재를 한 종입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에는 윌슨이 아시아에서 채집한 표본은 물론 메모, 사진 등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중국에서는 당시 그의 조사기록을 토대로 현재의 자생지를 찾아 식생을 비교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두 해 동안 국립수목원에서는 한국에서의 수목원과 식물원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였는데 사진 한 장, 기록 한 줄이 참으로 아쉬웠던 기억이 떠올라 그들이 자료를 소장하고 활용하며 이어가는 모습은 경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중에서 꼭 보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무조건 버리기보다 가치있는 자료들을 골라내는 일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이창복 교수 100주년 기념식

그러나 그 자료 혹은 문헌들은 어디서 어떻게 보관되어야 되어야 제대로 보전되고 이후에 활용될 수 있는 가를 생각하면 이는 훨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립수목원에 생물표본관을 지으면서 원로학자들의 고표본들이 소실되기 전에 모아두어야겠다고 판단되어 많은 조사와 탐문을 헸으나 상당수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이미 소실되어 버린 후여서 발을 동동 굴렀던 경험도 있고, 설사 평생의 수집물을 보관하고자 개인박물관을 지어도 당시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면 관리가 부실해지고 의미도 상실되는 경우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미 대학도서관에서는 장소의 문제로 장서를 기증받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속에 묻혀 사라질 진짜 중요한 사료는 누가 가려낼 수 있을지도 참 궁금합니다. 며칠 전 우리나라 식물분류학의 대가 수우 이창복 교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를 기리는 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유족이 표본과 자료를 기증하고 국립수목원 표본관에서 이를 정리하여 소장해 두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요.

어디 이러한 일들이 식물과 관련된 표본과 자료뿐이겠습니까. 우리 국민에게는 기록하는 습관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는 기록한 것을 제대로 보관하고 유지하는 시스템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개인적인 버리기를 시작했지만, 제대로 남기기는 더욱 어려운 숙제가 되었습니다. 혹시 저와 같이 버리기와 남기기를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신중하게 남기기로 결정한 자료를 어디에 남길 지가 고민이라면, 숲, 식물을 비롯한 산림생물, 혹은 수목원과 식물원에 관한 것이라면 국립수목원에 의논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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