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각삼각형의 세 변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정리로 유명한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수라고 했다. 그 중에서도 3이라는 숫자를 고귀하게 여겼다. 3은 그보다 작은 수의 합과 같고 그 이하의 숫자들의 합이 곱과 같다.
우리에게도 3은 오래 전부터 익숙한 숫자다. 단군신화의 환인은 환웅에게 세 가지 신물인 천부삼인을 하사해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비, 구름, 바람을 다스리는 세 신들을 데리고 태백산 아래로 내려왔다. 환인과 환웅과 단군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하나로 아우르는 천지인 사상과 연결된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기본모음을 만드는 구성요소이기도 했다. ‘삼세번’이라는 말도 있듯이 기회의 횟수로서 세 번도 익숙하다. 인재를 모셔올 때는 삼고초려 정도는 해야 하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삼천지교를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사법체계는 삼심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물리학에서도 3이라는 숫자는 심심찮게 등장한다. 우리 우주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기본단위는 원자이다. 20세기를 전후해서 과학자들은 원자가 음의 전기를 가진 전자와 양의 전기를 가진 원자핵으로 구성돼 있음을 알아냈다. 원자핵은 다시 양의 전기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가 없는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과학자들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다시 쿼크라고 하는 더 기본적인 입자의 조합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기로 이 우주에는 3쌍의 쿼크가 있다. 마치 배우자가 있는 삼형제와도 같다. 놀랍게도 전자 또한 자신을 닮은 형제가 둘 더 있다. 전자 삼형제에게도 각각의 배우자가 있다. 이들을 중성미자라고 한다. 전자 삼형제와 그 파트너인 세 개의 중성미자를 묶어서 경입자라 부른다. 세 쌍의 쿼크와 세 쌍의 경입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쿼크와 경입자가 왜 세 쌍으로 존재하는지 아직 우리는 근본적인 이유를 모른다.
한편 쿼크는 경입자에는 없는 독특한 성질의 색전하(color charge)를 갖고 있다. 여기서의 색은 일상 속의 색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작명이다. 양의 전기를 가진 양성자 여럿이 중성자와 함께 모여 전기적인 반발력을 이겨내고 안정적인 원자핵으로 뭉쳐 있을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이 색전하의 강력한 힘 덕분이다. 보통의 전기전하에는 양과 음의 두 종류밖에 없지만 색전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 때문에 (다소 복잡한 이유로) 양성자나 중성자는 세 개의 쿼크로 구성돼 있다.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로 내려가지 않더라도 3이라는 숫자는 우리의 거시적인 공간차원의 개수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3차원임은 경험적으로 너무나 확실하다. 다만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미시 영역에 부가적으로 덧차원이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끈이론에서는 무려 6개의 덧차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3은 물리학자들에게 좌절의 숫자이기도 하다. 지구, 달, 태양처럼 질량을 가진 세 물체가 서로 중력을 주고받으며 운동하는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수학적 해법은 없다. 이를 삼체문제라고 한다.
정치계의 숫자 3은 역동성의 대명사가 아닐까 싶다. 제갈공명이 천하삼분지계라는 묘수를 냈기 망정이지, 삼국지(三國志)가 아니라 이국지(二-)나 사국지(四-)였다면 우리가 아는 옛날 그 이야기의 재미는 반감(넷은 너무 많지 않은가!)되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삼국시대가 있었고, 현대사에서는 이른바 ‘3김 시대’도 겪었다. 1990년의 ‘3당 합당’과 1997년의 ‘DJP 연합’에 의한 정권교체 스토리는 삼국지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남북미 3국의 갈등은 한국전쟁과 분단, 냉전으로 얽힌 비극의 산물이다. 김영삼, 김대중, 김일성, 김정일, 클린턴, 부시 등 3국의 지난 지도자 면면도 만만치 않다. 문재인-김정은-트럼프라는 현재의 조합은 어떻게 엮어 보더라도 물리학의 삼체문제처럼 참 답이 없어 보인다. 각각의 캐릭터도 가히 ‘역대급’으로 독보적이다. 지난 일요일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이 빚어낸 감동과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다. 미국의 보수정권 대통령이 한국 보수의 기대를 저버리고 한국의 진보정권과 함께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획기적인 발걸음을 내디딘 점이나 이를 깎아내리기 바쁜 미국의 주류 언론, 그런 미국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급작스런 정상회담에 응한 북한지도자, 이 모두가 과거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다. 전환기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문법과 관습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6ㆍ30 ‘판문점의 기적’은 이 징조를 여실히 보여줬다. 냉전의 사고로는 70년 묵은 남북미 삼체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금단의 분계선을 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셋이 길을 떠나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한 명 있다(三人行 必有我師)고 하던가. 앞으로는 남북미 삼인행(三人行)에 필유평화(必有平和)하길, 한반도와 동북아에 평화와 번영의 완전한 새 시대가 열리길, 간절히 기원한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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