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 공식 서한도, 비선 조직도 아닌 ‘트위터’를 이용해서 만남을 제안하고, 핵무기 개발로 날을 세워온 상대방은 그걸 바로 받아서 채 24시간도 되지 않은 시점에 판문점에서 만났다. 이거 영화라고 해도 사람들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판문점이 어디인가. 1976년에는 도끼 만행 사건까지 일어났던, 미국 입장에서는 이가 갈리는 곳일 수도 있다.
지난 2월 북미 정상회담 역시 이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평양에서 기차로 출발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은 중국 단둥, 톈진, 우한, 난닝 등을 거쳐 베트남 랑선성 동당역에 무려 65시간40분, 3,800㎞를 달린 고된 여정 끝에 내렸다. 김일성, 김정일의 베트남 방문을 상기시키며 후계자로서의 적통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기왕에 미북 간의 대화를 통해 세계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김에 그러한 주목을 오래 지속시키며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을 수 있다. 북한 입장에서 이러한 ‘대장정’의 정점은 아마도 미북 간 합의를 통해 북한이 원하는 것을 얻어서 화려하게 귀국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김 위원장을 좋은 친구라고 치켜올리면서도 철저히 빈손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작년 5월에 제기한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북한 WMD의 폐기(PVID: permanent,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ing of North Korea’s WMD program)”가 관철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줄 수 없음을 전 세계에 확인한 것이다. 마치 ‘우리는 원하는 것을 말했다. 하지만 너희는 성의 있게 준비도 하지 않고, 괜히 공들여 수천 킬로미터를 열차로 왔구나. 미안하지만 그냥 돌아가라.’ 고 말하는 듯했다. 상대의 체면 살리기를 중시하는 국제외교 무대에서 상대를 완전히 박살낸 것이다. 물론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 우리 정부의 체면도 구겨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협상에서 이런 예측 불가능성의 단점은 상대로 하여금 매우 방어적이고 모호하게 행동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점도 있다. 상대에게 어떤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또한 자극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 위원장은 지난 4개월간의 고민을 뒤로 하고 다시 판문점에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판문점에서의 역사적 국경 넘나들기 이벤트가 끝난 뒤 나온 미국의 입장은 “아직 경제제재 해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돌발적 이벤트의 연속성 속에서도 미국의 입장과 원칙이 일관되어 있다는 점은 협상전략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어느 사이엔가 상대는 미국이 쳐놓은 강고한 원칙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방안을 고민하게 되어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핵무기라는 대형 판돈을 건 도박판에서 최대한 잇속을 차리고 싶지만, 경제제재라는 틀 안에서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예측파괴형 접근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는 외교가에서 오랜 기간 구축되어 온 관례와 관습을 철저히 붕괴시키면서 게임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전략은 그와 정치적으로는 반대 입장에 있지만 세계적인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주장하는 ‘초월적 접근(Transcendence)’과도 맥이 닿는다고 생각한다. 갈퉁은 지금까지 없었던 창의적 접근을 통해, 서로가 다 이득을 얻는 새로운 길을 함께 찾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반드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성취(Peace by peaceful means)라는 원칙은 버리지 말라고 한다. 먼 훗날 모두가 웃으며 오늘을 회상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 동북아 번영의 미래가 꼭 현실화되길 바란다.
김장현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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