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는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장르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16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화단의 독보적인 여성 화가다. 그는 르네상스 전후 수많은 빼어난 화가가 작품의 소재라 여기지 못한 성서와 신화 속 여성들을, 성모의 자애로움이나 루벤스 풍 여신들이 보여 준 정태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들의 힘과 분노를 화폭에 적극적으로 담아냈다.
그는 예술적으로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화가여서, 여성이라면 수녀가 되거나 한 남자의 아내(그리고 어머니)가 되는 길 외에 창녀가 되는 수밖에 없던 그 시대에, 피렌체 메니치가나 잉글랜드 왕가(찰스 1세)의 후원을 받으며, 친정이나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물감과 붓을 사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다시 말해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여성 예술인이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1593년 7월 8일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 화가인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를 수녀원에 보내려 했지만, 그 뜻을 꺾을 만큼 그는 고집 세고 재능도 남달랐다. 19세이던 1612년 오라치오가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르테미시아의 기량이) 완숙의 경지에 들어 감히 필적할 만한 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적었다.
앞서 17세 때인 1610년, 그는 아버지 친구인 한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의 문하에 들었다가 그에게 강간당했다. 딸과의 결혼마저 거부하자 오라치오는 타시를 고소했고, 타시는 처제와 불륜을 맺고 아내를 살해하려 한 사실까지 드러나 처벌받았다.
알려진 바 아르테미시아의 첫 작품의 모티프도 성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수산나와 두 장로’였다. 두 늙은 호색한이 신앙심 깊은 유부녀 수산나를 희롱하는 내용의 이야기.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으로 전해진 60여점 가운데 40여점이 여성을 그린 작품이고, 그중에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처럼 분노와 영웅적 고난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적지 않다. 한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당신은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한 여성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의 사망 연도는 불확실하다. 잊히다시피 한 그와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초 바로크 미술사가 로베르토 롱기(Roberto Longhi)에 의해 발굴됐고, 지난 세기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합당한 평가를 받게 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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