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한국인이 택시 운전석에서 내려 트렁크 문을 연다. 트렁크 안에는 또 다른 한국인이 몸을 구긴 채 잠들어 있다. 두 사람은 각자 있던 자리를 맞바꾼다. 1998년 개봉된 프랑스 영화 ‘택시’에서 짧게 묘사된 장면에 국내 대중은 분노했다. 97년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한국인이 프랑스 택시 안에서 숙식을 겸하며 돈벌이를 한다는 표현은 한국인을 비하한 것으로 해석됐다. 영화를 보며 반감을 가지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어두워졌다. 일중독 한국인에 대한 서구의 고정관념이 반영된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20여년 전보다 한국인의 노동시간은 많이 줄었다고 하나 한국은 여전히 ‘과로 사회’다. 2017년 기준 1인 주당 노동시간은 43.4시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37.3시간)보다 7시간이나 많다. OECD 회원국 사람들 평균보다 1주일에 하루 더 일하는 셈이다. 지난해 7월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며 노동시간은 다소 줄었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문화 분야에서 ‘과다노동’하면 떠오르는 곳은 방송 촬영 현장이다. 과로에 시달리는 방송 현장의 사례는 흔하디 흔하다. 지난해 방송됐던 MBC 드라마 ‘숨바꼭질’의 예를 들어보자. ‘숨바꼭질’은 7, 8월 폭염 속에서 하루 평균 18시간 넘게 촬영됐다. 이틀간 40시간 이상 촬영한 적도 두 차례 있었다. ‘숨바꼭질’은 그래도 양반에 속한다. 지난 2월 종방된 SBS 드라마 ‘황후의 품격’은 하루 최대 29시간 30분, 1주일에 120시간 넘게 촬영이 이뤄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살인적인 노동이라는 수식이 과장이 아니다. 노동 환경이 이러니 장시간 촬영을 마친 한 방송 스태프가 집에 돌아와 라면을 먹다가 숨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방송업은 노동시간 특례 업종으로 지난해 주 52시간 근무제 실시가 1년 유예됐다. 하지만 1일부터 직원 300명 이상 방송사에도 주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된다.
지상파 방송사와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방송스태프노조는 주 52시간 적용을 앞두고 지난달 제작환경 가이드라인에 대한 기본 합의를 체결했다. 스태프 근무 시간 단축과 처우 개선을 하자는데 뜻을 모았지만 방송 촬영 현장이 당장 좋아지리라고 기대하는 방송인들은 거의 없다. 특히 주 52시간 근무는 아직 꿈 같은 이야기다. 이전까지 법정 근무시간이었던 주 68시간을 지킨 방송 촬영 현장조차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한국 방송계의 고질병은 불공정한 관행이다. 지상파 방송이나 종합편성(종편)채널 등 갑에 위치한 방송사들이 외주제작사들을 쥐어짜서 수익을 내고 있다. 주요 방송사는 편성권을 무기로 외주제작사에 제작비를 낮춰 프로그램을 맡기고, 외주제작사는 스태프의 임금을 낮게 책정하거나 장시간 노동을 통해 수익을 보전한다. 소수의 강자가 다수의 약자 위에 군림하는 먹이 피라미드가 견고하게 구축돼 있다.
방송과 함께 영상 산업의 양대축인 영화도 한 때는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도마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영화는 방송과 다른 길을 갔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이 준수했다고 해 화제가 됐던 표준근로계약서는 영화계에서 정착 단계다. 표준근로계약서는 스태프의 장시간 근로와 부당한 처우를 막기 위해 노사가 약정한 사항을 담고 있는데,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영화 스태프의 75%가 표준근로계약서를 경험했다.
일각에서는 방송시장 내 치열한 경쟁에 따른 영업이익 감소와 제작비 상승을 주 52시간 정착의 걸림돌로 지적한다. 30일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KBS가 지난해 585억원의 영업손실을 보는 등 지상파 방송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하지만 나눔의 의지가 중요하다. 영화계는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으로 제작비가 5~10% 상승했다. 투자배급사와 제작사가 예전보다 손해를 보고 있으나 큰 불만은 나오지 않는다. 방송 현장에도 인간적인 노동 환경이 구현되기 위해선 결국 갑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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