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판결문 꼭꼭 숨긴 대법원
법원도서관

밤 11시50분 이수형(가명) 변호사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황급히 노트북을 펼치고 대법원 홈페이지에 들어간 그는 정확히 자정이 되자 2주 후 날짜의 원하는 시간대를 눌러 개인정보, 방문목적, 명함 등을 황급히 입력한다. 마치고 시계를 보니 0시7분. 그가 방금 마친 것은 법원 판결문 열람신청이다. 이 변호사는 “5분에서 10분만에 마감되기 때문에 하나라도 잘못 입력해 시간이 늦을까 마음을 졸이게 된다”며 “아이돌 콘서트 티켓 예매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단 4대뿐인 ‘열람실’,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

이 변호사는 한 달에 최소 두세 번씩 자정마다 이 전쟁을 치른다. 전국 법원에서 나온 판결문을 원문 그대로 보려면 이렇게 예약을 해서 대법원에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연간 1,800만건(본안 이외 사건 및 비송사건 포함) 이상을 처리하는 ‘사법대국’임에도, 대법원이 일반인들에게 개방하는 판결문 열람실에는 개인용 컴퓨터(PC)가 단 4대뿐이다. 그나마 1인당 이용 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제한돼 PC 1대당 5명, 하루당 20명에게만 기회가 허락된다. 이 바늘구멍을 뚫으려 전국의 법조인과 일반 국민이 자정마다 예약 경쟁을 치른다.

운 좋게 예약에 성공해도 판결문을 받아보기까지는 ‘산너머 산’이다. 대법원 청사에 있는 법원도서관 특별열람실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한다. 가방은 뒷자리에, 휴대폰은 PC옆 거치대에 두고 오로지 빈 종이와 펜 하나만 들고 자리에 앉을 수 있다. 한 로스쿨 재학생은 “로비에 신분증을 맡겨야 건물 입장이 가능한데 열람실 직원이 또 한번 신분증을 요구한다”며 “명함도 없으니 신용카드 영문 이름을 보여주며 실랑이 끝에 자리에 앉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열람을 마쳐도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나갈 수 있다. 종이에 적을 수 있는 것은 법원명과 사건번호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판결문을 제대로 보려면 다시 대법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건번호를 적고 사본을 신청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러면 법원은 이름과 법인명 등을 가리는 ‘비실명화’ 작업을 거치고 3~5일 후 판결문 사본을 보내준다.

어렵사리 판결문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일반인들은 또 한번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사건관계인이나 회사명이 모두 ‘AA, AB’ 같은 알파벳으로 바뀌어 있어 판결문을 읽는 건지 암호를 해독하는 건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법조인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일반인의 접근이 사실상 통제된 거나 다름없다.

[저작권 한국일보]미확정 판결문 공개에대한 생각/ 강준구 기자/2019-07-07(한국일보)
0.1%만 공개.. 사본 신청은 1부당 1000원

법조인들의 또 다른 고민은 비용 문제다. 법원은 비실명 작업을 위해 1건당 1,000원씩의 수수료를 받고 있는데, 통상 한 번에 수십 건씩 판결문을 요청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 그나마 확정 사건만 사본 신청이나 열람이 가능하고, 상급심에서 재판이 계속되고 있는 사건은 하급심 판결문을 볼 수 없다.

법원이 자발적으로 공개하는 판결문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종합법률정보사이트에는 1983년 이후 판결문 총 7만8,901건이 등록돼 일반인도 열람이 가능하다. 법원은 “인력과 예산이 허용되는 한도 내에서 선례적 가치가 있는 중요 판결을 선별해 비실명 작업을 거쳐 게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이 수치가 법원이 처리한 판결의 0.1%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2018년 법원의 처리건수(본안 기준)은 143만9,721건이었는데, 이 중 신규 등록한 판결문은 1,805건(0.12%)이다. 이는 헌법재판소가 1988년 출범 후 선고한 결정문 전체를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대법원 홈페이지의 판결문 방문열람 신청 페이지. 2주 전부터 예약이 가능한데 자정에 예약 서비스를 오픈하면 10분도 안돼 마감이 된다. 대법원 홈페이지 캡쳐
‘판결 공개 원칙’ 지적에 법원 “입법의 문제”

이처럼 한번이라도 판결문을 구하려고 시도해본 사람은 “한국에서 판결문은 공개가 아니라 비공개가 원칙”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중 삼중 장치로 판결문을 숨겨놓고 일부만 예외적으로 공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판결 공개를 규정하는 헌법 109조(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해야 한다)를 위반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원 쪽도 할 말은 있다. 법원이 판결문 공개를 최대한 제한하는 핵심적 이유는 개인정보 보호 때문이다. 판결문에는 소송 당사자의 주소나 이름, 주민번호 등이 기재돼 있고, 기업사건은 영업비밀이 노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법원은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 판결문 공개가 개인정보법에 위반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항변한다. 현재 국회에는 누구나 판결문의 열람과 복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민ㆍ형사소송법 개정안(금태섭 의원안)이 발의돼 있다.

법원 측에선 예산 문제도 비공개의 이유로 삼는다. 김선수 대법관이 재야변호사 시절인 2008년 펴낸 책 ‘사법개혁 리포트’를 보면 2005년 참여정부가 비실명화 작업을 통한 판결문 전면 공개를 추진했으나 법원이 217억원의 예산이 예상된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법조계는 판사들이 판결문 공개에 따른 논란과 파장을 감당할 수 없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있다고 의심한다. 실제 지난해 법원 내부 설문조사에 따르면 판사 10명 중 7, 8명은 미확정 판결문을 공개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금태섭 의원이 국민 1,0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80% 이상이 공개에 찬성했다. 서울중앙지법 한 판사는 “판결문 공개를 거부할 명분이 별로 없다는 것은 대부분 판사들도 알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한 달에 수십 건씩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판결 하나 하나가 공개돼 논쟁이 되는 상황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법원도 제도 개선을 고심 중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올해 초부터 형사 판결문에 대한 임의어 검색을 허용했고 추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PC 4대 밖에 없는 열람실도 지방법원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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