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4>대한독립공명단장 최양옥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김경진기자

1929년 4월 서울 교외 망우리에서 ‘권총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3인조 강도는 우편물 수송차를 세우고 돈을 빼앗고, 신고하지 못하도록 지나가는 자동차를 파손한 뒤 운전수들을 인질 삼아 산으로 도피했다. 수백 명의 경찰이 동원되는 추격전 끝에, 한 명은 산에서 잡히고 2명은 경성으로 숨어들었으나 결국 붙잡혔다.

이 범죄는 구체성을 더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띤다. 범죄 대상은 일제의 우편물 수송차. 일본 우편차에서 돈을 빼앗으려 한 목적은 만주에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3인조는 최양옥(1893~1983ㆍ건국훈장 독립장), 김정련(1895~1968ㆍ건국훈장 독립장), 이선구(1902~미상ㆍ건국훈장 애국장) 지사였다.

이들은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 소속이었다. 공명단의 단장 최양옥 지사가 주도했던 이 우편차 습격 사건은 서울 상공을 날았던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로서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원했던 안창남(1901~1930ㆍ건국훈장 애국장) 지사의 꿈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행사 출신 독립운동가 안창남 지사의 모습. 1923년 일본의 ‘역사사진’ 8월호에 실린 사진이다.
◇비행사 안창남과 만나다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 지사가 서울 상공을 2회 15분간씩 30분간 비행했다. 5만여명이 지켜봤고 시민들은 환호했다. 일본의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의 민간 비행사 시험에서 공동 1위를 차지했던 안창남은 개벽지(1923년 1월호)에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이라는 글을 썼다. ‘그 하늘에 비행기가 나르기는 결코 1, 2차가 아니었을 것이나 그 비행은 우리에게 대한 어떤 의미로의 모욕, 아니면 어떤 자는 일종 위협의 의미까지를 띤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잘하나 못하나 우리끼리가 기뻐하고 반가워하는 중에 우리끼리의 한 몸으로 내가 날을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더할 수 없이 유쾌히 생각하였습니다. 참으로 일본서 비행할 때마다 기두(비행기 머리)를 서천(서쪽 하늘)으로 향하고 보이지도 않는 이 경성을 바라보고 오고 싶은 마음에 가슴 뛰며 몇 번이나 눈물을 지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아이돌 같은 인기를 누렸던 그도 독립의 염원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안창남 지사는 1924년 12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上海)에서 비행사 양성을 위해 임시정부 요인과 접촉하였으나 비행학교를 설립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안 지사는 여운형(1885~1947ㆍ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선생 소개로 옌시산(閻錫山) 군벌의 항공 중장으로 초빙돼 산시(陝西) 비행학교에서 연습생을 육성하며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1928년 음력 6월에서 9월 사이. 타이위엔(太原)에서 안 지사는 최양옥, 신덕영(1890~1968ㆍ건국훈장 독립장) 등과 함께 ‘함께 소리 내어 알린다’는 의미의 공명단을 조직한다(횡성인 최양옥의 독립을 위한 몸부림, 김동정). 최양옥 지사는 이후 김정련 지사를 공명단에 가입시켰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7권에 따르면, 시점은 조금 차이가 있지만 비슷하게 서술돼 있다. 1927년 최양옥은 안창남, 신덕영, 김정련 등과 더불어 북만주에서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했다고 돼 있다. 여기에 드는 기금 모집과 연락을 위해 서울에 공명당 지부를 설치할 목적으로 최 지사는 김정련, 이선구 지사와 더불어 1929년 4월에 국내 잠입했다.

안 지사는 최양옥, 김정련 지사에게 권총과 탄환 등을 주고, 최 지사에겐 600원의 자금을 준다. 횡성문화원에서 최 지사의 증언 등을 토대로 발간한 ‘횡성인 최양옥의 독립을 위한 몸부림’ 책자에 따르면, 경춘가도의 우편차량을 탈취해 한번에 20만~30만원 정도의 자금을 마련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최 지사였다. 동행자였던 김 지사는 신의주부청의 자동차운전수 이선구를 동지로 가입시키고, 3명은 우편차량 탈취 계획을 함께 한다.

최양옥 지사의 장남 최돈용씨(오른쪽)와 며느리 이성자씨가 인천 부평구 자택에서 생전 최 지사의 사진이 담긴 사진첩을 보여주고 있다. 이진희기자
◇일제 우편차를 노려라

4월 18일 춘천을 출발한 경성우편국 제7호 차량이 오후 1시 40분쯤 마석 고개(당시 양주군 미금면과 화도면의 경계)에 도착했다. 3인조는 손을 들어 차를 정차 시킨 뒤, 운전사에게 총을 겨눠서 그를 묶고 이선구가 운전을 했다. 춘천으로 향하던 자동차를 만나자, 신고할 것을 우려해 차를 세우고 기관부 발화장치를 파괴한 뒤 운전사와 승객들을 우편차의 상자에 감금했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1권). 이후 또 다른 차량도 세워 그 운전사와 우편차량 운전사를 데리고 천마산으로 도피했다. 도중 운전사들은 돌려보냈다. 그러나 3인조가 얻은 돈은 승객들이 가진 60원 정도에 불과했다. 우편행낭에는 채권뿐 현금이 없었다.

산으로 도피하다 김 지사는 일행에서 떨어져 체포됐고, 최 지사와 이 지사는 자동차를 빼앗아 이 지사가 직접 운전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약 130명의 무장경관대가 산을 둘러싸고 접근했지만, 2명은 빠져나갔다. 그러나 결국 이선구는 서울 지인의 집을 찾았다가 잠복한 경찰에 잡혔고, 최 지사도 체부동 친척의 집에 있다가 4월 21일 새벽 경찰에 체포됐다. 종로경찰서 무장경관대 100여명이 겹겹이 집을 에워쌌다(동아일보, 1929년 4월 22일).

재판이 시작되자 이 지사는 재판장에게 요구한다. “우리 세 사람은 사생을 같이 하던 동지로 공판 심리전 악수로써 인사를 하고 싶다”라고. 재판장이 허락하자, 세 명은 기쁨으로 굳게 손을 잡아 인사 했다. 경찰에 잡혀 같은 철창에 있으나 담으로 격리돼 서로 얼굴도 변변히 대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선고 결과는 최양옥 징역 10년, 김정련 징역 8년, 이선구 징역 5년이었다(독립운동사7권). 김 지사와 이 지사의 형량은 각각 9년, 6년이었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 최 지사는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김정련, 이선구 지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는데 이 지사는 옥중에서 순국했다. 최 지사는 생전 “이선구는 일제가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하며 고문 후유증이 겹쳐서 옥중에서 순국했다”고 회고했다.

최양옥 지사는 공명단을 만들기 전에도 횡성 4ㆍ1만세운동(3ㆍ1운동은 횡성지역에서 3월 말부터 4월 초에 가장 격렬하게 이뤄졌고 4ㆍ1만세운동으로 불림)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뒤 탈출했으며, 신덕영 지사의 권유로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해 군자금 모금을 하다가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5년을 복역했다. 총 15년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김 지사 또한 이전에 항일 독립연설, 3ㆍ1운동에 참여했다가 수 차례 수감된 적이 있다. 최 지사 등 3인조가 체포된 이듬해인 1930년, 안창남 지사도 비행교육 중 추락해 사망했다.


◇안혁명은 누구인가

공명단의 대낮 우편차 습격 사건은 호외가 뿌려질 정도로 전국을 들썩이게 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조서를 보면, 최 지사는 “공명단장 안혁명(安革命)의 주지에 찬성하고 입단했다”고 돼 있다. 최 지사는 “안혁명은 본적이 황해도이며, 50세 정도”라고 진술했다. 최양옥ㆍ김정련 지사에게 권총과 탄환을 준 것도 안혁명 단장이라고 말했다. 최 지사는 “공명단은 1911년 안혁명 외 몇 명이 미국 하와이에서 결사 조직한 것이고 약 3,000명의 단원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목적 수행상 지장이 많아 중국 상하이에 지부를 설치하고 단장과 간부도 그 곳으로 이동해 본부처럼 활동하고 있다” “상하이 지부에서만 60~70명의 단원이 있고 목적은 조선 독립을 꾀하는 것”이라고 했다.

안혁명의 성씨와 무기를 최 지사 등에게 건넸다는 진술로 봐서, 안창남 지사와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일제를 교란하기 위한 거짓 진술이며, 안혁명은 가상의 인물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생전 최양옥 지사를 면담했던 박순업 횡성문화원장은 “최 지사 본인의 말도 그렇고 당시 신문기사 등을 봐도 최 지사가 공명단 우두머리”라며 “조직을 숨기기 위해서 점조직 형태라 조직원들을 모른다고 진술하고 안혁명이라는 가상의 단장을 내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 지사는 신문기자들도 교란했다. 그는 우편차 습격 사건 후 체포되면서 기자들을 향해 “신문기자제군! 공명단(共明團)도 모르나? 밝을 명(明) 자를 몰라서 울 명(鳴) 자를 쓰다니”라고 빈정거렸다( 1934년 6월 ‘별건곤’ 73호, 중앙일보 최문우 기자 취재기). 기자들은 이 때문에 밝을 명으로 고쳤다가, 경찰당국이 울 명자로 주장해서 처음대로 울 명으로 또 고쳤다고 한다.

최양옥 지사는 육필 수기에서 수감생활에 대해 “십 년이라는 장구한 시일 그 고통이라는 말은 입으로 다 할 수 없고 지필로 다 쓸 수 없다”고 요약했다. 최 지사의 장남 최돈용(74)씨는 아버지가 겪은 고문에 대해 “수동 전화기에다가 전기선을 연결해서 전화기를 돌리며 전기고문을 하고, 거꾸로 매달아 물고문을 했다”고 전했다. 최 지사의 며느리 이성자(75)씨는 “그나마 체질이 건강하신 편이어서 견디셨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평소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고 진통제로 사셨다”고 말했다. 최씨는 “아버지는 생전에 독립운동은 누구나 다 할 일이니 내세우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며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며느리가 부추 반찬을 하면 “예전에 (먹을 것이 없는) 만주에서 부추와 녹말을 끓여서 먹곤 했다”는 말을 하셨던 정도이다.

◇“죽어서는 아버지 곁에”

독립운동으로 15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최 지사의 묘소는 국립현충원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생전 강원도 갑천면의 아버지(최재건) 묘 앞에 자신의 가묘를 만들고, 자녀들에게 “내가 죽거든 아버지 발 밑에 묻어달라”고 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불효를 했으니, 죽어서는 아버지와 함께 하겠다는 뜻이었다.

최돈용씨는 “국립묘지에 모시면 관리도 편하고 자랑스럽기 때문에 형제들 중에서 그냥 국립묘지에 모시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잘 아는지라 유지를 따랐다”고 말했다. 1983년까지 살았던 최 지사는 독재 시절에도 조병옥ㆍ신익희ㆍ김대중 선생 등과 같은 야당인사들을 지지하고 측면에서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직접 정치인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5ㆍ16쿠데타 이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독립유공자들을 초청해 “도와달라”고 했을 때, 최 지사는 “하는 것 봐서 하겠다”고 면전에서 말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최돈용씨는 “사실상 도울 생각 없다는 소리였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아버지는 ‘정치권에서 여야 가릴 것 없이 누가 뭐해 줄게, 우리에게 와라’고 해도 안가고 안받으셨다”고 전했다. 그는 “돈이 되지 않은 야당 쪽 지구당위원장 정도를 하셨고, 미군 쓰레기 일부를 받아와서 분류해 되팔아서 먹고 살았다”고 했다. 최씨는 “아버지는 돈이라고는 전혀 모르시고 자신의 의지대로 사셨는데 그때는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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