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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신립의 배수진 선택이 최선인 이유

입력
2019.06.29 04:40
수정
2019.07.11 10:3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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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탄금대전투

방어엔 조령이 유리하지만 보급로 확보와 후퇴 어려워

궁기병 장점 살려 달천평야서 공격했지만 매복에 당해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함경도(북관) 지역에서 무공을 세운 장수들을 다룬 조선시대 역사화첩 ‘북관유적도첩’에 수록된 ‘일전해위도’. 신립이 함경도 은성부사로 재직하던 1583년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 침입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묘사했다.
함경도(북관) 지역에서 무공을 세운 장수들을 다룬 조선시대 역사화첩 ‘북관유적도첩’에 수록된 ‘일전해위도’. 신립이 함경도 은성부사로 재직하던 1583년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 침입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묘사했다.

1592년 양력 6월5일, 신립은 충주성 서북 4㎞ 지점에 부대를 배치했다. 북쪽에는 남한강이, 서쪽에는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이 흐르는 이 곳의 이름은 달천평야였다. 신립이 지휘하는 조선군 8,000명은 강을 등지고 남동쪽을 향했다. 달천평야 북단의 남한강변 절벽은 탄금대라고 불렸다. 즉 신립은 죽기 아니면 살기의 전술인 배수진을 펼쳤다.

◇왜군의 파죽지세

일본은 같은 해 5월23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5월24일 정발과 부산진 수비병력 600명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일본 1군 1만8,700명을 상대로 싸우다 전멸했다. 같은 날 윤흥신 휘하의 다대포진 병력 700명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5월25일에는 송상현 지휘하에 3,000명이 지키던 경상좌도 방어의 핵심 동래부가 함락됐다. 수백 명에서 많아야 3,000명 정도로 2만 명 가까운 적을 상대하려다보니 싸우는 족족 연전연패였다. 왜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조선군의 병력은 모이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했다.

5월25일, 왜구가 아닌 왜군의 침입 소식이 한성에 전해졌다. 조선은 이일을 경상도순변사로 급파하기로 결정했다. ‘변방을 순찰하는 왕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의 순변사는 지역 군무를 결정할 권한을 가졌다. 1538년생으로 전라좌수사, 함북병사, 전라병사 등을 거친 이일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군인 두 명 중 하나였다. 특히 1583년과 1587년 약 3만명 병력을 가진 여진족 니탕개의 함경도 6진 침공 때 공을 세우며 이름을 날렸다. 조선으로서는 킹 카드를 뽑아든 셈이었다.

6월2일, 이일은 약 60명의 기병과 함께 경상도 상주목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모은 4,000명의 추가 보병은 행진 속도가 느려 합류하려면 시간이 한참 더 필요했다. 즉 이일이 지휘한 전체 병력은 원래 상주목 병력 약 700명을 더해 800명이 전부였다. 왜군이 이미 가까이 왔다는 제보가 있었으나 이일은 이를 무시했다. 6월4일, 이일은 상주성 북서쪽의 북천 남쪽에 진을 쳤다. 이 또한 배수진이었다. 1만8,300명의 고니시 부대는 순식간에 이일 부대를 유린했다. 이일은 거의 단기로 도망쳐 충주목으로 피신했다.

◇조선 제일의 장수 무너지다

사실 조선의 진짜 에이스 카드는 따로 있었다. 이일보다 여덟 살 어린 신립이었다. 함북병사, 함남병사, 평안병사를 거친 신립은 니탕개의 난 때 누구보다도 큰 공을 세운 군인이었다. 신립은 장기는 기병전술이었다. 원래 말을 잘 타는 여진족 부대를 상대로 그 이상의 전투력을 실전에서 증명해보였다. 조선은 이일을 선봉으로 보내면서 동시에 신립을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했다. 충청, 경상, 전라의 삼도를 통할하는 도순변사인 신립에게 거는 기대가 이일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었다.

신립은 자신의 임무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적의 기세가 매우 드세니 도성으로 후퇴하여 지키도록 하소서”하는 건의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립은 더 이상 논하지 않고 80명의 기병과 함께 한성을 떠났다. 6월5일, 신립은 충주목에 도착했다. 그 날 상주전투에서 패배한 이일이 충주성으로 도망왔다. 신립이 충주목으로 오는 길에 모병한 3,000명과 충주목사 이종장이 충주 근방에서 모아온 5,000명을 합쳐 8,000명의 병력이 신립 밑에 모였다.

신립은 중대한 사항 한 가지를 결정해야 했다. 자신의 부대를 어디에 배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충주목 남쪽의 조령, 즉 문경새재에서 방어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조령은 지세가 험준해 적은 병력으로 방어전을 펼치기 좋았다. 또 관민이 힘을 합쳐 싸울 수 있는 충주성에서 농성하는 방안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충주성 서쪽의 달천평야에 진을 치는 방안이 있었다. 신립은 마지막 세 번째 방안을 택했다. 그리곤 부대가 전멸되면서 자신의 목숨도 잃었다. 이후 신립은 무능한 군인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패장을 위한 변명

여러 선택지가 있을 때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이른바 최적화기법이 존재한다. 수학의 한 분야로 경제학에서도 활용하는 최적화기법을 신립이 알았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최적화기법을 통해 당시 신립의 결정을 분석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조령과 충주성, 그리고 달천평야의 세 곳은 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해발고도가 642m인 조령이 지형상 방어에 유리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충주성은 약간의 유리함이 있었고 달천평야는 보통은 되는 지형이었다. 방어 자체만을 놓고 보면 조령이 제일 유리함은 사실이었다. 명의 군인 이여송은 나중에 조령을 지나면서 “이런 천혜의 요지를 두고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립은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지형은 중요하지만 유일한 고려사항이 될 수는 없었다. 왜군은 1만8,000명 정도 남은 고니시 1군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군 2만2,800명은 경주를 점령하고 단양의 죽령을 넘을 계획이었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3군 1만1,000명은 김해, 성주를 유린하고 추풍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선은 죽령에는 성응길을, 추풍령에는 조경을 보내 방어하게 했지만 병력은 많지 않았다. 즉 신립은 조령 하나만을 마음 편히 지키고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아무리 조령을 지켜내도 죽령이나 추풍령이 뚫리면 한성이 위험해졌다. 삼도도순변사인 신립은 모든 왜군의 진격을 막을 책임이 있었다.

다른 고개로 왜군이 우회침투할 가능성을 감안하면 후방과 연결이 쉬운 보급로의 확보가 중요했다. 그런 면으로 조령은 확실히 불리했다. 제일 남쪽에 위치하기도 했고 유사시 부대를 빼 후퇴하기도 까다로웠다. 달천평야가 조령보다는 나았지만 약간의 불리함이 있었고, 충주성은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세 번째 고려사항은 전투시 장점의 활용이었다. 조선군의 강점은 보병이 아닌 기병에 있었다. 신립은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궁기병대로 전과를 내던 군인이었다. 부산진부터 상주목까지 조선은 성을 이용한 방어와 보병전투에서 졌다. 신립으로서는 자신이 잘하는 전술로 왜군 1진의 예봉을 꺾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할 법했다. 궁기병전술을 펼치는 면으로는 달천평야에 확실한 유리함이 있었다. 충주성에서 농성하면 기병 활용에 당연히 제약이 있었고, 조령은 그런 면으로 최악이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 고려사항을 갖고 최적화를 풀면 조령이 아닌 달천평야를 선택하라는 결론이 나온다. 일방적으로 신립의 결정을 폄하할 일은 아니라는 의미다. 전투는 의외성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최선의 결정을 내렸지만 질 수도 있고 최악의 결정을 내렸지만 운이 좋아 이길 수도 있다. 단지 졌다는 이유만으로 선택이 잘못됐다고 얘기함은 섣부르다.

◇최선의 선택, 최악의 결과

6월6일, 고니시 선봉대는 이미 충주목 근방에 나타났다. 상주목에서 충주목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60㎞였다. 즉 하루에 약 30㎞씩 주파할 정도로 왜군의 진격속도는 빨랐다. 다음날인 6월7일 낮에 왜군 7,000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에서 앞선다고 판단한 신립은 기병대를 이끌고 달천평야의 남쪽에 나타난 왜군 7,000명에게 두 차례 공격을 퍼부었다.

7,000명이 왜군의 전부는 아니었다. 고니시는 전투 전 자신의 부대를 넷으로 나눴다. 달천을 따라 조선군의 서쪽에 5,000명을, 동쪽에 3,000명을 매복시켰다. 또한 배후에 숨겨둔 3,000명이 조선군이 공격에 정신 팔린 사이 달천평야 동북쪽의 텅비다시피한 충주성을 기습해 점령했다. 8,000명 조선군은 왜군 7,000명을 포위하려다 역으로 1만8,000명에게 포위되어버렸다. 죽령을 통과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바꿔, 고니시 부대와 거의 같은 시점에 조령을 통과한 가토의 2군은 전투에 참가할 필요도 없었다. 결과는 조선군 병력의 전멸이었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끝까지 활을 쏘며 저항하다 자결했다. 이일은 상주전투에 이어 또 다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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