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 영화가 밤하늘의 별처럼 명멸하는 요즘, 1955년에 개봉된 ‘로마의 휴일’은 지금 봐도 손색이 없는 명작이다. 실제로 요즘에도 로마에 가는 분들 중에 환갑이 훌쩍 넘은 이 영화를 보는 경우가 상당수 있을 정도다. 영화에서 그레고리 펙이 오드리 헵번을 놀릴 때 사용한 로마 시대의 돌로 된 하수도 뚜껑에는 오늘도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꼬리를 물고 서 있다. ‘로마의 휴일’은 이렇게 시공을 초월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로마는 분수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분수가 많다. 그러나 단연 압권은 트레비 분수가 아닐까?! 트레비 분수는 1762년에 완공되었으니, 고대 유적들이 즐비한 로마에서는 아직 파릇파릇한 청춘인 셈이다.
트레비 분수의 압도적 위상 역시 ‘로마의 휴일’ 때문이다. 영화는 분수에 동전을 1번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게 되고, 2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며, 3번 던지면 사랑이 깨진다는 속설을 확산한다. 이로 인해 1년에 이곳에서 걷히는 동전만 한화로 19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동전으로는 단연 대기업 수준이라 할만하다.
트레비 분수는 로마를 흐르는 인공 수로인 아쿠아 베르지네 지하 수로의 물을 낙차를 이용해 뿜어져 나오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용출(湧出)하는 물이 3개의 층계형 수반(水盤)을 발(簾)처럼 흘러내리며, 특유의 잔잔한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요즘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장대하게 솟구치는 위압적인 분수나 음악분수처럼 아름답게 파노라마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물을 뿜는 분수인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전통에는 이런 물을 거꾸로 솟구치게 하는 분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는 산과 물이 핵심 소재가 되는 산수화와 역시 물이 중요한 대상으로 등장하는 풍수지리가 존재한다. 그런데 산수화나 풍수지리에서의 물은 인위적인 극복이나 조절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결부되어 함께 흘러가는 조화의 물일 뿐이다. 물론 동아시아에도 중국 하나라 우임금의 황하 관리(치수)에서처럼, 인간을 위협하는 물에 대해서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최소에 그친다. 왜냐하면 극복이 아닌 자연과의 조화가 동아시아의 정신경계가 추구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분수는 우리의 전통 관념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역수(逆水)일 뿐이다. 이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폭포는 사랑하지만 분수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오늘날 잘 정돈된 폐허인 양주의 회암사지는 고려말에서 조선 중기까지를 대표하는 최고의 사찰유적이다. 회암사는 왕자의 난으로 삶에 깊은 상처를 입은 상왕 이성계가 머물며, 무학대사의 가르침 속에서 영혼을 치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발굴을 통해서 드러난 회암사에는 많은 운치 있는 수로가 있었다. 그러나 이 수로들은 거대한 돌을 다듬어 인위적으로 다양한 물길을 내었지만, 모두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순수(順水)로 되어 있을 뿐이다. 물의 본성을 어기지 않고 물을 다스리는 우리 전통의 조화로운 해결책인 셈이다. 이런 물의 흐름을 통해 다양한 물소리와 전통 정원인 화계(花階) 즉 꽃의 계단에는 윤택한 풍요로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천연스러운 조화. 이것은 비규정적인 물을 치석(治石)된 돌의 규정성으로 흘려보내는 곡선과 직선이 연출하는 삶의 예술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인공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쓰임을 성취하게 된다. 또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람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특유의 유장한 가치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에게는 트레비 분수의 화려한 자태와 포세이돈의 위압적인 카리스마는 없지만, 자연 그대로를 빌려오는 멋스러운 기개와 낭만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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