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황사영 백서 사건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소장 돼 있는 황사영 백서는 작은 천 조각에 무려 1만3,384자가 빼곡히 적혀 있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제공
 ◇황사영과 배론 토굴 

황사영(黃嗣永ㆍ1775~1801)은 천재였다. 16세 나던 1790년에 진사시에 당당히 급제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22세 때 생원시에 급제한 다산보다 6년이나 앞섰다. 이 놀라운 천재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정조가 16세 소년을 따로 불렀다. 임금은 총기가 넘치는 소년의 손목을 잡고서 말했다. “20세가 되거든 다시 오너라. 내가 너를 중히 쓰겠다.” 이후 그는 임금의 손길이 닿았던 그 손목에 명주천을 감고 다녔다.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다산의 큰 형님 정약현의 딸이었다. 다산의 누이인 이승훈의 부인은 황사영에게는 처고모였다. 황사영은 다산의 조카 사위이자 당이모의 외손자로도 얽혀 있었다. 황사영은 당시 한창 열성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다산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798년 서울로 올라온 황사영은 마포의 애오개에 집을 마련했다. 주문모 신부도 여러 번 자기 집에 모셨다. 박해가 시작된 뒤 다산의 입을 통해 천주교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황사영의 이름이 고발되었다. 이때 다산은 그를 잡는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천주교의 지도부는 이미 궤멸된 상태였으므로, 그마저 잡힐 경우 조선 천주교회에는 더 이상 남은 희망이 없었다.

황사영은 수염이 몹시 아름다웠다. 2월 중순 이후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멋진 수염을 깎아 버리고 상복을 입은 채 이상주(李喪主)로 행세하며 여러 곳을 숨어 다니다가, 3월에 제천의 배론(舟論) 땅에 숨어들었다. 배론은 길이 4㎞에 달하는 계곡이 배 모양이어서 얻은 이름이었다.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이 형성한 교우촌으로 옹기를 구워 생활하던 곳이었다.

황사영은 이곳 신자들이 마련해준 토굴에 은신했다. 비탈에 흙을 파서 지은 반 움집이었다. 입구는 큰 옹기 그릇을 쌓아 막아 밖에서는 토굴의 존재를 알 수가 없었다.

 ◇1만3,384자의 깨알 글씨, 황사영 백서 

8월 23일 배론으로 황사영을 찾아온 황심(黃沁ㆍ1756~1801)은 주문모 신부가 자수한 후 참혹하게 처형당한 소식을 알려왔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웠다. 황사영은 캄캄한 토굴 속에 등불을 켜고 ‘음읍탄성(飮泣呑聲)’ 즉 울음을 마시고 소리를 삼키며 북경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회에 불어 닥친 광풍을 보고하는 길고 긴 편지를 썼다.

가로 62㎝, 세로 38㎝의 명주천에 매행 124자에서 96자씩 122행에 걸쳐 썼다. 어두운 토굴 속 가물대는 등불 아래서 황사영은 이 작은 천 조각에 무려 1만3,384자를 또박또박 흐트러짐 없이 썼다. 피눈물을 흘리며 썼다. 확대경이 아니고는 글씨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았다. 옷 속에 넣어야 했기에 무조건 크기가 작아야 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신해박해에서 1801년 신유박해까지 조선 천주교회의 자취와 주요 순교자들의 행적을 낱낱이 적고, 교회 재건 방안을 건의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추안급국안’과 ‘눌암기략’에 황사영이 토굴에서 썼다는 일기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토굴에 있는 동안 지난 조선천주교회의 역사를 일기장에 기록해왔고, 황심에게서 주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자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더 얹어서 초고를 마련한 뒤 백서에 옮겨 적었을 것이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황심에게 건네, 북경 교회에 전달토록 할 작정이었다. 황심은 이미 4, 5년 전부터 북경을 왕래하며 조선 천구교회와 북경 교회를 연결하던 신자였다. 하지만 9월 15일 황심이 체포되면서 나흘 뒤인 18일에 황사영은 토굴을 급습한 관원에게 체포되었다. 백서는 그의 옷 속에 둘둘 말린 채 발견되어 압수되었다. 10월 3일 의금부로 이송된 황사영의 백서를 본 조정은 겉잡을 수 없는 충격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1801년 3월, 조선 조정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처형했지만 의복과 언어가 조선인과 다름 없었고, 그 자신이 소주 사람이라고 했으나 조선인으로 간주해 군문효수형에 처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한 터였다. 그런데 황사영의 백서에는 주 신부의 입국부터 선교활동, 그리고 순교 당시의 자세한 정황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자칫 이 백서가 중국 황제에게 들어가 처형의 진상이 폭로될 경우 조선 조정은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 백서가 혹시라도 다른 경로를 통해 중국에 전달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조선 조정은 노심초사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서양의 큰 배 한 척을 보내 조선 국왕을 협박해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케 해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조선 정부가 전교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 중국인 주 신부의 처형 사실을 중국에 알리겠다고 하면 조선 정부가 겁을 먹고 말을 들을 테니, 이를 겁박 카드로 쓸 수 있다고 적었다. 10월 9일부터 황사영의 추국이 시작되었다. 황심과 옥천희 등을 끌어내 대질심문을 했고, 취조는 외국 선박을 끌어들여 조선의 임금을 협박해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청원의 반역성에 대한 추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다시 끌려온 다산 형제 

불똥이 대번에 장기와 신지도로 귀양 가 있던 다산 형제에게로 튀었다. 10월 15일에 다산 형제와 이승훈의 동생 이치훈을 잡아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0월 20일에 다산은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0월 22일, 사헌부 장령 이기경이 기다렸다는 듯이 국문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번이야말로 다산을 죽일 마지막 기회였다. 이때 황사영은 백서에서 다산에 대해, “전부터 천주를 믿었으나 목숨을 훔쳐 배교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비록 천주교를 해쳤으나 속마음에는 아직도 죽은 신앙(死信)이 있습니다”라고 썼다. 배교의 상태이지만 다산의 내면에 아직 신앙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산의 벗 윤영희(尹永僖ㆍ1761~1828)가 상황을 알아보려고 대사간 박장설을 찾아갔다. 그때 마침 공서파의 홍낙안이 박장설의 거처를 방문했다. 윤영희는 그와 마주치는 것이 껄끄러워 옆방으로 피해 버렸다. 사정을 모른 채 홍낙안은 들어오자마자 박장설에게 불끈 성을 냈다. “1천 사람을 죽여도 아무개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한 가지요. 공은 어찌 힘써 다투지 않는 게요?” 박장설이 대답했다. “저가 스스로 안 죽는데, 내가 어찌 죽인단 말인가?” 그가 돌아가자 박장설이 윤영희에게 말했다. “답답한 사람일세. 죽일 수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도모하여 거듭 큰 옥사를 일으키고도, 또 날더러 다투지 않는다고 저 야단이니, 참 답답한 사람일세.” 그 아무개는 말할 것도 없이 다산이었다. ‘사암연보’에 보인다.

이때 막 황해도 관찰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정일환(鄭日煥)이 다산이 곡산에서 펼친 선정이 너무도 훌륭했다면서 다산을 두둔했다. 만약 그에게 죽음을 내린다면 반드시 지나친 옥사라는 비난을 부르게 될 것이라며 저들의 책략에 말려들면 안 된다고 영의정을 설득했다. 막상 조정에서도 다산이 이들과 연계된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황심은 10월 24일에 정약종의 하인 김한빈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국문장에서 황사영은 자신이 도망치는 바람에 신부님을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원통해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천주교의 지도자 명단을 대라는 심문에 이미 죽었거나 체포된 40여명의 명단을 제출했다. 황사영은 사건에 연루된 옥천희, 현계흠과 함께 11월 5일에 처형되었다. 가산이 적몰됐다. 그의 어머니 이소사는 거제도로 귀양 갔고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두 살배기 외아들 황경헌과 함께 제주도로 노비로 끌려갔다.

 ◇토사주문과 황제의 어이없는 답장 

백서 사건 발생 이후 조선 정부는 주문모 신부를 처형한 일을 더 이상 감출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때마침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으로 출발해야 할 시점이었다. 10월 27일 대제학 이만수(李晩秀ㆍ1752~1820)가 왕명에 따라 황제께 올릴 ‘토사주문(討邪奏文)’을 작성했다. 이만수는 예의의 조선에 사적(邪賊)이 준동하여 정약종 책롱사건으로 전모를 알게 된 경과와 중국인 신부 주문모 검거, 그리고 황사영 백서 사건의 전말을 두리뭉실 얼버무려서 황제께 보고했다.

주 신부에 대해서는 처음에 조선 사람인 줄 알고 죽였는데, 뒤늦게 황사영의 백서를 보니 그가 중국 소주부 사람이라 하므로, 황사영의 말을 믿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사실 여부를 떠나 도리상 이 문제를 황제께 아뢰니 두루 살펴주십사 청하였다. 그리고는 황사영 백서 중에서 조선 정부에 유리한 내용만 발췌 요약해서 1만3,384자를 16행 923자로 줄여 흰 비단에 써서 첨부했다. 조선 정부로서는 어떻게든 정면 돌파로 중국의 양해를 구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했다. 이 앞뒤 맥락 없이 임의로 줄인 백서를 가백서(假帛書)라 부른다. 황사영의 백서에 대한 후대의 극렬한 반응은 전체 백서가 아닌 이 가백서만을 본 탓이 컸다.

대왕대비는 황사영을 처형한 11월 5일로 천주교 관련 옥사의 추국을 종결 지었다. 이미 처벌받은 이들에 대한 재심을 금하고, 재심을 얻기 위한 교섭마저도 금지했다. 같은 날 다산과 정약전은 다시 강진과 흑산도 유배형이 결정되어 의금부 문을 나섰다. 11월 8일에는 조정에서 사당(邪黨)을 주토(誅討)한 일을 종묘에 고유(告由)하는 문제로 논의가 있었다. 1년 내내 천주교 문제로 피를 너무 많이 보았다. 주문모 신부 처형 사실과 백서 사건을 묶어 황제께 주문까지 올린 상태였다. 또 주모자급이 모두 처형되었다는 판단이어서 이쯤에서 이 문제를 마무리 짓고 국면을 전환할 필요를 느꼈다.

이듬해 봄 동지사 조윤대(曺允大ㆍ1748~1813)가 들고 온 황제의 짧은 답장은 조선 조정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조선에서 올린 ‘토사주문’을 잘 읽었노라 하고, 보고 내용을 보니 앞뒤가 맞지 않고, 조선 사신 일행이 북경에 와서 외국인과 만나 사귀는 일을 윤허한 적이 없으므로 이들이 선교사와 만나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니 사학의 무리가 북경에 와서 서양인의 종교를 배우고 갔다는 말은 의심의 여지 없이 잘못된 이야기이며 그들이 꾸며댄 말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주문모의 처형에 대해서는 아예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아서 조선 정부가 가장 마음 졸이던 문제는 그냥 없던 일로 되고 말았다. 대비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사영의 백서는 조선 정부를 강타한 메가톤급 폭발력을 가진 문서였다. 이 때문에 백서는 “천지를 다하고 고금을 통틀어 일찍이 없었던 흉서(窮天地亘古今所無之凶書 궁천지긍고금소무지흉서)”란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편집된 가백서만 보고서 황사영의 이름 앞에 거품을 물었다.

조선 정부가 속전속결로 이 사건을 처리하여 덮은 뒤, 이 문서는 의금부 비밀 창고 속에 들어가 세상에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 문서의 원본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의금부와 포도청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를 소각, 정리 처분하면서 세상에 다시 나왔다. 당시 이를 본 관리가 폐기 직전 천주교도이자 자신의 친구인 이건영에게 백서 원본을 건네주었고, 이건영은 이를 당시 조선교구장 민덕효 주교에 올렸다. 민 주교는 1925년 로마 바티칸에서 거행된 조선 천주교 순교자 79위 시복식 당시 이 백서의 원본을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다. 오늘날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황사영 백서 원본이 소장된 이유이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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