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21일 서울 중구 IBK기업은행 본사에서 열린 혁신금융 비전선포식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금융위원회는 2016년 8월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제도 개선안’을 발표하고, “혁신기업에 적극적으로 모험자본 공급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증권사들에게 발행어음 사업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금융당국의 논리는 시중은행의 기업대출이 지나치게 건전성 위주로 이뤄져 혁신형 기업에는 과감한 투자가 힘들고, 벤처캐피탈은 자금의 절대규모가 작아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충분한 자본력을 토대로 모험자본을 적극 공급할 ‘투자은행(IB)’ 즉, 증권사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나왔다. 당시 금융당국은 증권사의 각종 기업공개(IPO), 인수합병(M&A) 등 기업금융 경험과, 미래 성장 가능성 위주의 심사능력을 고려해 효과적인 자금공급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증권사들은 쾌재를 불렀다. 수십년간 은행에만 주어졌던 사실상의 ‘예금ㆍ대출 기능’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또 정부가 발행어음 사업권을 따낼 기본 조건으로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인 초대형 증권사’를 내걸면서 몸집 불리기에도 좋은 계기를 맞았다.

이에 대형 증권사들은 앞다퉈 자기자본을 늘려나갔다. 2016년 11월부터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 미래에셋대우증권, NH투자증권 순으로 자기자본 4조원을 넘겼다. 이후 2017년 4월 자본시장법 시행령이 개정됐고, 같은 해 11월 한국투자증권이 첫 발행어음 사업 인가를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은행권 반발은 상당했다. “증권사가 사실상 은행업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 은행들의 주된 반대 이유였지만, 대형 증권사가 발행어음 조달자금을 애초 목적과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반대 근거였다. 지금까지의 발행어음 조달자금 사용 실태를 보면, 이 같은 은행의 우려는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대형 증권사들의 최근 행태는 혁신산업을 키우려는 역대 정부의 정책방향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월 ‘혁신금융안’을 발표하면서 증권사의 발행어음을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혁신금융이 창업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맥”이라며 “(이를 위해) 초대형 IB의 혁신ㆍ벤처투자 인센티브를 강화하는 등 민간 모험자본 공급도 확대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인센티브는 증권사 발행어음 조달한도(자기자본의 200%)를 산정할 때, 혁신ㆍ벤처기업 투자금액은 제외시켜주는 것이었다.

한편에선 그간 정부의 발행어음 밀어주기 정책이 ‘실제 효과는 제쳐두고 속도만 강조한 무리수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타트업ㆍ벤처기업에게 흘러 들어갈 자금 통로도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채, 막대한 자금부터 모으도록 제도를 만든 뒤 증권사들의 선의(善意)에만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증권사 발행어음은 기본적으로 만기가 짧은 단기금융상품으로, 벤처기업에 사용되더라도 임시ㆍ긴급 자금 용도로 쓰일 가능성이 높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며 “현재 이 정도로 긴급하게 자금이 필요한 스타트업ㆍ벤처기업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성급히 제도부터 만들어진 상황으로도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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