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박물관 예술감독 목은정 패션 디자이너
“고단함의 연속이었지만 3대가 소통하는 모습을 볼 때 뿌듯함과 행복함을 느낍니다.”
‘근현대 100년, 기억의 보관소’를 콘셉트로 지난 4월 6일 종로구 신문로에서 재단장한 모습을 드러낸 돈의문박물관마을(9,770㎡). 이 곳에 오면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하다. 쥐약 벽보와 과거 선거 공보물, 오락실과 영화관 등 1960~80년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12개 테마의 체험형 전시관을 볼 수 있어서다.
최근 핫플레이스로 환골탈태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평일에는 2,000~3,000명, 주말에는 6,000명~1만명 정도가 이 마을을 찾는다. 예술가들의 창작ㆍ전시 기획 공간으로 활용되던 시절, 하루 방문객이 10여명 정도에 불과해 도심 내 ‘유령마을’로 불리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이 나오기까지에는 서울시, 마을 운영업체기획사, 실물 작업 스태프 등 많은 이들의 땀과 노고가 깃들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목은정 디자이너의 기여도를 빼놓을 수 없다.
24일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목 디자이너는 2월 초 마을 운영업체로부터 사업 참여 요청을 받고 “내 땅처럼 꾸미고 싶었고, 이 공간을 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960~80년대 마을로 재단장하면 핫플레이스가 될 자신이 있었다”고도 했다.
기획 작업 후 2월 말까지 1차 작업에 전력을 다했다. 이 때 조성된 전시관이 영화관, 사진관, 콤퓨타게임방 등 9개 동 등이다.
3월 초순부터 3월말까지 진행된 2차 공사 기간 이용원, 생활사박물관, 시민갤러리 등이 완성됐다.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마을 내 소품 3,000개를 다 찾아서 설치했단다. “기성 제품이 아니고 실생활에 사용하던 것이어야 해서 소품을 다 구하느라 진땀을 뼀다”고 급박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책상과 장롱은 자신이 집에서 쓰던 걸 옮겨 놓았다.
마을을 꾸미고, 소품을 구하고 설치하는 모든 일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직접 드릴 공구를 사용하고, 커텐봉을 달고, 사다리를 올라갔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인부들의 눈빛도 달라졌다고 한다.
목 디자이너는 자신들이 살았던 공간을 잃어버린 세대(현 노년층)와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삶의 양상을 간접 경험하는 세대(청년층)가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함께 교류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공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실제 최근 마을을 찾은 3대에서 이를 목격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바둑을 두며 손자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동안, 할머니, 며느리, 손녀는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그는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향수에 젖게 만드는 과거의 모습을 복제했다는 비판을 가한다. 그의 생각은 어떨까. “박제든 모방이든 상관없다.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는 마을과 소품을 재현하면 이야깃거리가 생긴다”며 “추억을 이야기할 공간이 생기고 세대 간 소통의 장이 형성되면 충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사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패션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2014년 2월 말 원로 배우 샤론 패럴의 의상 제작을 요청 받아 오스카 시상식에 참여하면서 레드카펫을 처음 밟은 한국인이 됐다. 내친 김에 갈라 파티에서 태극기를 소재로 한복 패션쇼를 개최해 국위 선양도 했다. 딸 김채영(20)씨는 유럽 미술의 거장 반 고흐가 졸업한 세계 3대 예술학교인 벨기에 앤트워프 왕립학교 페인팅학과에 재학 중이다.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 부은 돈의문박물관마을에 더 바라는 것이 있을까. 목 디자이너는 “돈의문박물관마을 폐장이 오후 7시인데, 여름에는 시민들에게 공간을 더 오랫동안 열어주면 시민들이 돗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시민이 돈의문박물관마을의 주인’이라는 그다운 생각이었다.
배성재 기자 pass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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