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에 ‘부활’과 ‘복수’의 메시지 던진 박근혜
홍문종 탈당, 물갈이 국면 ‘친박 엑소더스’ 서막
황교안 살 길은 탄핵 책임 인정과 인재 영입뿐
’박근혜 정치’를 규정 짓는 특징 중 하나는 ‘배신 트라우마’다. 아버지 박정희 죽음 후 그가 쓴 회고와 일기에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배신”이라는 대목 등 배신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대통령 재임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인 유승민 의원을 겨냥해 “국민들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했던 말은 그의 특이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징표다.
탄핵과 하야, 투옥 등 일련의 과정은 박 전 대통령에게 사람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강화했을 게 분명하다. 외부 면회와 재판 출석 등 바깥과 연결된 일체의 끈을 단절한 채 침잠하는 모습에서 그런 분위기가 읽힌다. 자신에 대한 반성과 회한보다 “억울하게 당했다”는 심리가 클 것이다. 그런데 그 치를 떠는 배신감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 그는 이미 측근 변호사를 통해 분노와 원망이 문재인 정부보다 자유한국당 탄핵파로 향해 있음을 알렸다. 당시 새누리당 의원 40여명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으면 탄핵안은 부결됐으리라는 상황 인식에 근거한다.
박 전 대통령은 명예 회복과 ‘복수’를 실현하는 방법은 정치적 재기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정치를 시작했듯이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제2의 정치 입문’은 불가피하다고 여길 것이다. 자신의 부활을 알리고 ‘배신자’ 한국당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정치적 복안이 이미 서 있지 않을까.
친박 중진인 홍문종 의원의 한국당 탈당과 대한애국당과의 신당 추진 계획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홍 의원으로서는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매일반인 터에 내지른 일이겠으나 배경엔 박근혜와의 교감 또는 이심전심이 있었을 개연성은 있다. 물론 박 전 대통령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감옥으로 배달되는 하루 수십ㆍ수백 통의 지지자 편지를 빠짐없이 읽는다는 것을 보면 적어도 TK(대구ㆍ경북)와 극우 노년층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질 법하다. 조만간 한국당 공천에서 내몰릴 다른 친박들이 합류하면 과거 18대 총선에서 14석을 얻은 ‘친박연대’의 재연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길지 모른다.
다급해진 건 황교안 한국당 대표다. ‘민심대장정’으로 집토끼는 잡았고 이제 산토끼를 잡겠다고 나선 판에 홍문종 탈당으로 전략에 균열이 생겼다. 친박, 비박 가릴 것 없이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퍼붓고, 치솟던 당 지지율도 정체 상태다. 어렵사리 세운 리더십이 가랑비에 옷 젖듯 힘을 잃어가는 형국이다.
황 대표는 ‘진실의 순간’에 마주 섰다. 친박계의 도움으로 당 대표가 되고 ‘황세모’라는 별명처럼 탄핵에 모호한 입장을 표명하며 버텨 왔지만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다. 박근혜 세력으로부터 “너는 친박이 아니다”라고 파문당한 마당에 어설픈 ‘친박 코스프레’ 행세는 더는 통하지 않게 됐다. 친박 지지도 얻고 중도 보수도 손에 넣는 방법은 없다. 박근혜와 당에 실망해 등을 돌렸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에 일부 보수가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은 정통 보수 세력의 마음까지 되돌릴 상황은 아니다.
황 대표는 이런 난관을 외부 인재 영입으로 돌파하려 하고 있다. 진보진영에 대선 주자가 넘쳐나는데 보수진영은 손에 꼽힐 정도로 심각한 인물난을 겪고 있다. 이명박ㆍ박근혜 대통령 시절 ‘친이’ ‘친박’으로 나뉘어 골육상쟁을 한 자업자득이고 보면 참신한 인물의 영입은 당연한 방향이다. 그러나 보수 몰락을 가져온 탄핵사태에 대해 2년이 넘도록 사과는 고사하고 입장조차 정리되지 않은 당에 유능한 인재들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황 대표가 사는 길은 친박을 청산하고 거기에 새 인물들을 영입해 보수의 가치와 철학을 채우는 것이다. 황교안은 문재인을 상대하기에 앞서 박근혜와 대결해야 한다. 박근혜에 지면 ‘황교안 리더십’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다. 대선은커녕 총선도 치르기 전에 거꾸러지기 십상이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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