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뉴칼레도니아. 한국일보 자료사진

‘천국의 섬’ ‘지상 낙원’으로 불리는 피지, 뉴칼레도니아 등 남태평양 섬들이 마약 밀매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웃 국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마약 소비량이 폭증하면서 중남미를 떠난 마약 밀매선들이 이곳 관광지들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약 청정지역이던 남태평양 섬에도 마약이 흘러들어 중독과 이를 동반한 강력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23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은 “중남미에서 코카인과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싣고 호주로 향하는 배가 급증해 그 길목에 있는 섬에서 대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약 운반 거점으로 활용되는 섬은 남태평양 피지, 파푸아뉴기니, 통가, 뉴칼레도니아 등. 이미 이곳 해수면 아래와 해안가는 수십억 달러어치 마약 은닉 공간으로 전락했다. 수면 아래 그물에서 GPS 수신기가 달린 마약 저장고가 현지 주민들에 의해 발견될 정도다.

보도에 따르면 남태평양 섬들은 수십 년 전부터 마약 운반 기점으로 활용됐지만, 최근 5년간 이곳으로 몰려드는 마약 규모가 크게 증가했다. 2004년 바누아투 해안에서 코카인 120㎏을 몰수했던 현지 경찰은 당시 “태평양 국가 역사상 가장 많은 양”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2013년 경찰은 그보다 6배 많은 마약을 몰수했다. 2017년 뉴칼레도니아에선 코카인 1.6톤을 실은 요트가 발각됐으며, 호주 동부 해안에서 당국에 붙잡힌 보트에는 코카인 1.4톤이 실려 있었다. 각각 최소 2억달러(약 2,314억원)어치에 해당하는 양이다.

남태평양 마약 이동 신 루트. 그래픽=송정근 기자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건 인접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마약 소비량 증가 탓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두 국가의 1인당 코카인 사용률은 전 세계 1위다. 마약 1g당 지불하는 금액은 300호주달러(약 24만원)에 달해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마약을 구입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마약 밀매업자 입장에선 이만한 시장이 없는 셈. 여기에 중남미에서 호주와 뉴질랜드로 향하는 직항노선이 드물고 공항 세관통제가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밀매업자들은 남태평양을 주요 마약 운반 루트로 활용하게 됐다.

문제는 중남미와 호주 사이 길목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태평양 섬 주민들도 마약에 물들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밀매업자들이 섬에 정박할 때마다 마약을 지불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이것이 시장에 유통돼 점점 중독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호주연방경찰(AFP)에서 태평양 지역을 담당했던 브렛 키드너는 가디언에 “남태평양 국가들은 처음에 마약을 호주와 뉴질랜드의 문제로만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내 마약 사용량도 증가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며 “피지, 통가, 사모아에선 확실히 마약 사용량이 늘었다”고 말했다.

다른 강력 범죄도 덩달아 발생하고 있다. 피지에 거주하면서 마약 중독에 빠져든 이안 콜링우드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곳 마약상들은 매우 위험하다”며 “그들은 사람을 납치하고, 얼굴에 산을 뿌리며 살인을 저지른다”고 했다. 콜링우드에 따르면 지난 1, 2년간 피지에서 이 같은 사건으로 숨진 사람만 6~8명에 이른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섬이 오랜 기간 마약 청정지역이었던 만큼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피지에는 마약 사용이나 중독에 관한 통계자료가 전무하다. 중독 치료를 위한 클리닉도, 전문가도, 마약 중독자 익명 모임도 없다. 치료를 원하는 중독자들은 피지 수도 수바 소재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는 수밖에 없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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