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96세 정씨 2007년 해외잠적… 檢, 키르기스와 공조 추적 중
4남 정한근씨 “아버지, 작년 에콰도르서 사망” 검찰에 진술
도피 21년 만에 중미 국가인 파나마에서 붙잡힌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아들 정한근 씨가 22일 오후 국적기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4남 정한근씨가 해외도피 21년 만에 국내로 송환됐다.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정씨의 도피 행각은 미국 브라질 등 5개국의 찰떡 공조로 막을 내리게 됐다. 정씨의 20여년 해외도피 생활의 마감으로 무엇보다 정 전 회장의 생사나 소재가 파악될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씨의 도주는 21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찰에 따르면 정씨는 1997년 1월 부도로 한보그룹 전체가 파산하자 남은 회사 자금을 해외로 빼돌리는 과정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당시 검찰 수사과정에서 한보그룹 자회사인 동아시아가스(EAGC)가 보유한 ‘루시아석유’ 주식 매각자금 322억원을 횡령해 스위스의 비밀 계좌로 빼돌린 혐의까지 드러났다. 이런 혐의로 98년 6월17일 서울중앙지검에서 한차례 조사를 받은 뒤 그는 도주했다.

그 뒤로 검찰은 정씨의 행방을 집요하게 쫓았지만 어디서도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행방이 묘연해진 정씨가 해외로 도피한 것으로 보고 2008년 9월 그를 불구속 기소할 수밖에 없었다. 피의자가 해외로 도피한 경우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되지만 정씨가 출국기록을 남기지 않고 해외로 밀항한 상태라서 시효정지 제도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기소를 하는 길밖에 없었다.

[저작권 한국일보] 한보사테 일지 - 송정근 기자/2019-06-23(한국일보)

20년 가량 행방이 묘연하던 정씨가 검찰 수사망에 걸려든 것은 2017년 6월. 그가 미국에 체류 중이라는 언론 보도를 계기로 소재 추적에 나선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은 정씨의 부인과 자녀의 출입국내역을 확인한 끝에 정씨의 가족이 캐나다에 거주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씨가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벨리즈의 시민권자로 위장해 캐나다와 미국의 영주권과 시민권을 순차적으로 획득한 사실도 파악됐다. 정씨가 이 과정에서 국내에 거주하는 고교 친구 A씨의 신상을 활용했으며 이름을 ‘류 다니엘’ ‘류 다니엘 승현’ ‘류 신 헨리’ 등으로 바꾼 바꾼 사실도 드러났다. 특히 2011년에는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A씨의 이름으로 대만계 미국인과 결혼한 사실도 파악됐다.

하지만 방송 보도가 나가자 정씨는 2017년 7월 미국 시민권을 이용해 에콰도르에 입국하면서 검찰의 추적을 따돌렸다. 이에 검찰은 에콰도르 정부를 통해 정씨를 송환하려 했으나 한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에콰도르의 대법원에게 거부당했다. 이에 검찰이 우회 방법을 포함해 지속적인 공조 요청을 한 끝에 에콰도르 정부로부터 ‘정씨가 미국 LA로 출국하려 한다’는 출국사실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지난 18일 파나마를 거쳐 LA로 향하려던 정씨의 계획은 결국 미국과 에콰도르, 파나마 정부 등의 협조 끝에 무산되고 말았다.

정씨의 장기 도피생활이 종지부를 찍으면서 한보사태의 몸통인 정 전 회장의 소재도 파악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보사태에 연루돼 징역을 살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정 전 회장은 영동대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다른 사건과 관련해 재판을 받던 2007년 5월 출국해 12년째 귀국하지 않고 있다.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겠다고 법원의 허가를 받은 뒤 돌연 사라진 정 전 회장은 살아있다면 96세지만, 아직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 전 회장은 당초 일본으로 출국한다고 법원에 밝혔으나 사실은 일본이 아닌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로 출국한 뒤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때부터 그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한 법무부 당국의 추적이 시작됐는데, 법무부가 카자흐스탄 당국에 범죄인인도를 요청하자 정 전 회장은 키르기스스탄으로 거처를 옮기는 등 추격전이 벌어졌다. 키르기스스탄으로 이동한 이후 금광사업을 한다는 말이 돌았지만 현재 행방은 물론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정 전 회장의 도피 행각은 그를 도운 친인척들의 수사에서 일부 확인되기도 했다. 그의 며느리 김모(51)씨는 2007∼2008년 카자흐스탄에 해외 유학생 유치를 위한 지사를 설립한 뒤 운영비 명목으로 1억3,5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1년을 확정받았다. 정 전 회장이 카자흐스탄 현지에서 간호사 4명을 고용해 간병을 받은 사실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정씨는 전날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 예세민)에 출석해 조사를 받으며 “아버지는 지난해 에콰도르에서 사망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검찰은 이 같은 정씨의 진술과 무관하게 정 전 회장에 대한 추적을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정 전 회장이 체납한 국세만 약 2,225억원이라 검찰로서는 신병 확보를 멈출 수 없는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정 전 회장의 생사는 아직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며 “정 전 회장을 추적 중이라는 사실을 정씨가 이미 알고 있었던 만큼, 그의 진술에는 전혀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정 전 회장이 정씨처럼 신분 세탁을 했을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국제 공조를 통해 그의 출입국 기록 등 객관적 자료를 확보해 나가고 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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