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마다 불거지는 요금 폭탄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마련한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에 한국전력 이사회가 제동을 걸었다. 매년 7~8월 누진구간을 확대하는 개편안이 시행될 경우 재무건전성이 악화할 수 밖에 없는 한전이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든 모양새다.
한전은 21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이사회를 열고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에 대해 논의했으나,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의결을 보류했다고 밝혔다. 이날 이사회에는 김종갑 한전 사장 등 상임이사 7명과 이사회 의장인 김태유 서울대 공대 명예교수를 포함한 비상임이사 8명이 전원 참석했다. 김태유 교수는 “대화가 더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아 의결을 미뤘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18일 민관합동 전기요금 누진제 태스크포스(TF)는 여름철(7~8월)마다 누진 구간을 확대해 요금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을 한전 이사회에 최종 권고했다. 누진구간 상한선을 1구간은 기존보다 100㎾h, 2구간은 50㎾h 각각 높이는 방안으로, 누진구간은 △1단계 300㎾h 이하 △2단계 301~450㎾h △3단계 450㎾h 초과로 각각 조정된다. 이 방안이 시행되면 TF는 전국 1,629만 가구의 전기요금이 월평균 1만142원(지난해 기준)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한전은 이 방안으로 매년 2,847억원의 추가 부담을 떠안게 돼 경영난이 심화될 거란 우려가 나왔다. 한전은 2017년 1조4,000억 원이 넘는 흑자를 내다가 지난해 1조2,000억원에 달하는 적자를 냈다. 올해 1분기에도 역대 최대 영업적자(6,299억원ㆍ1분기 기준)를 기록했다. 국제연료가격 상승으로 전력구입비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전 소액주주들은 “한전 재무구조에 악영향을 미치는 누진제 개편안을 의결할 경우 이사진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경고한 상황이다. 한전은 국내 로펌 두 곳에 배임 가능성에 대한 법률검토도 진행했다.
이사회의 이번 결정은 이런 한전의 경영난과 무관하지 않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한 비상임이사는 이사회가 의결을 보류한 이유에 대해 “한전의 경영상황과 이사진이 짊어지게 될 책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TF가 최종 권고안을 이사회에 전달하는 등 누진제 개편안 시행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정부에서 아무런 지원책을 내놓지 않자 한전 이사회가 반기를 들며 압박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의 한 사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누진제 개편안 시행 전에 한전 이사회가 정부에게 제대로 된 손실 보전 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앞서 박찬기 산업통상자원부 전력시장과장은 이달 초 TF가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소요재원 일부를 재정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었다.
한전 이사회는 조만간 관련 논의를 다시 진행할 계획이다.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업무상 배임에 해당되지 않도록 결정하겠다”(한 비상임이사)는 분위기여서 누진제 개편안이 부결되는 최악의 경우는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한전 관계자는 “7월 이후 개편안이 시행되더라도 요금제를 소급 적용해 7월 할인 금액 만큼 8월 전기요금에서 공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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