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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호주판 '난민 장벽'에,,, 자해ㆍ자살이 일상화 되다

입력
2019.06.29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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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6일 호주 정부가 인근 섬나라인 파푸아뉴기니의 마누스섬에서 운영하는 역외 난민시설에 수용된 이민자들이 열악한 처우 및 폐쇄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진 사진이다. 이에 앞서 파푸아뉴기니 대법원은 “호주로 가려는 망명 신청자들을 그들의 뜻에 반해 마누스섬 수용소에 가두는 건 위헌”이라고 판결, 이곳은 폐쇄 결정이 내려졌다. 로이터 연합뉴스
2017년 11월 6일 호주 정부가 인근 섬나라인 파푸아뉴기니의 마누스섬에서 운영하는 역외 난민시설에 수용된 이민자들이 열악한 처우 및 폐쇄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진 사진이다. 이에 앞서 파푸아뉴기니 대법원은 “호주로 가려는 망명 신청자들을 그들의 뜻에 반해 마누스섬 수용소에 가두는 건 위헌”이라고 판결, 이곳은 폐쇄 결정이 내려졌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10일 남태평양에 위치한 인구 800만명의 독립국 파푸아뉴기니 북부 마누스섬에서 소말리아 출신 30세 난민 한 명이 분신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타전됐다. 생명엔 지장이 없었으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급속히 퍼진 사진 속 그의 상반신엔 심각한 화상이 가득했다. 마누스섬에는 전쟁과 박해를 피해 호주로 향한 보트 난민들이 다시 호주 정부에 의해 ‘유배’되다시피 수용된 감호소 시설이 있다. 호주가 ‘지역난민심사센터(RPC)’라 이름을 붙인 이 역외(offshore) 시설은 2013년 7월 19일 케빈 러드(노동당) 당시 호주 총리와 피터 오닐 파푸아뉴기니 총리의 합의로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 마누스섬은 물론, 인근 나우루공화국에도 이런 RPC시설이 있다.

나우루에는 여성과 아이 등 주로 가족 단위의 난민들이, 파푸아뉴기니엔 홀로 피신한 남성들이 각각 수용된다. 소말리아 난민이 머물던 ‘로렝고 동부 캠프’는 2017년 10월 호주가 마누스의 기존 RPC 시설을 폐쇄하면서 만든 3곳의 ‘트랜짓 센터’(정식 거주지가 정해질 때까지 임시로 머무는 곳) 중 하나였다. 국제앰네스티는 이 가운데 두 곳은 시설이 매우 열악하다고 지적했다. 난민들을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이주시키고 있는 호주의 입장은 확고하다. 그들을 자국 영토에 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세계 난민의 날(6월 20일)을 앞두고도 계속 이어진 마누스 난민들의 자해ㆍ자살 시도 사태에 그대로 투영됐다. 2016년 유엔난민기구(UNHCR)가 호주 상원 법사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마누스 난민의 88%가 우울증과 불안감,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다. 2013년 두 역외난민시설이 재가동된 이후 숨진 난민은 12명에 달한다. 대부분 자살이다. 지난 10일 소말리아 출신 난민의 분신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최근 더욱 절박해진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 데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지난달 18일 치러진 호주 총선은 난민들의 간절한 희망과는 달리, 우파계열 정당연합인 ‘자유국민연합’의 재집권으로 귀결됐다. 노동당의 집권을 바랐던 난민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사실 노동당은 2013년 역외난민센터를 재가동한 당사자로, ‘보트 난민을 국내로 들이지 않는다’는 태도에는 보수 진영과 차이가 없다. 다만 이번 선거에서 노동당은 이민정책에 일부 차별화를 기했다. 나우루와 마누스 난민 150명을 자국에 재정착시키겠다는 뉴질랜드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사실 뉴질랜드의 이런 제안은 2013년부터 있었는데, 호주 정부는 이것마저 반대하며 난민들의 재정착 기회를 원천 봉쇄했다. ‘뉴질랜드 재정착이 이뤄지면 다시 호주로 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2017년 9월 호주 멜버른 외무부 청사 앞에서 로힝야족 출신 이민자들이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을 비판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멜버른=EPA 연합뉴스
2017년 9월 호주 멜버른 외무부 청사 앞에서 로힝야족 출신 이민자들이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을 비판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멜버른=EPA 연합뉴스

따라서 “뉴질랜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노동당의 이민 정책 노선 변화는 난민들에겐 실낱같은 희망이자 기회로 인식됐다. 선거 직전 스리랑카 타밀족 출신 마누스 난민 샤민단 카나파티는 호주 유권자들을 상대로 호소하는 영상을 SNS에 올렸다. “공감의 가치와 자유, 그리고 정의를 위해 투표해 주십시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노동당은 집권에 실패했다.

쿠르드계 이란 언론인 출신으로 마누스 실상을 상세히 전해 온 베루즈 부차니는 총선 사흘 뒤인 지난달 21일 트위터를 통해 현재의 마누스 상황을 “통제 불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오늘 두 명이 더 자살을 시도했다. 지난밤엔 한 명이 시도했다. (선거 후) 총 9명이 자살을 시도했다. 아무도, 그 누구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선거 후 한 달이 흐른 시점인 19일엔 샤민단이 트위터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선거 이래 총 90건의 자살시도 또는 자해 사건이 있었다. 통제 불능이다”.

앰네스티 호주지부와 호주난민협회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공동보고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에 인용된 킴 카르 노동당 상원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5월 21일 기준 마누스섬에는 아프가니스탄(105명)과 수단(73명), 이라크(47명), 소말리아(36명), 스리랑카(20명), 시리아(1명) 등 전 세계 주요 분쟁 지역에서 피신한 이들이 모여 있다. 종교나 종족 문제로 차별과 박해를 받아 온 이란(260명), 로힝야(49명 추정), 파키스탄(86명) 출신도 만만찮다. 난민 발생 요건을 두루 갖춘 국가 출신이 다양하게 포진해 있는 셈이다.

호주 정부는 2016년 11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의 미국과 이른바 ‘난민 교환 협정’을 성사시킨 바 있다. 협정에 따르면 미국은 호주의 나우루ㆍ마누스 난민들을 최대 1,250명까지 자국에 받아들이고, 호주는 미국에 있는 중남미 출신 난민들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최악의 멍청한 협정”이라고 불렀다. 마누스섬 난민 79%가 이미 호주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들임에도 불구, 미국으로 향하기 위한 난민 재심사 절차는 길고 까다로워졌다. 지금까지 미국에 정착한 마누스ㆍ나우르 난민은 530명 정도에 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최근 미국은 심사를 거친 마누스ㆍ나우루 난민 300명에 대해 ‘거절’ 결정을 내렸다. 호주의 난민 인권단체인 ‘난민센터’에 따르면, 지난 3월 현재 나우루에는 360명, 파푸아뉴기니에는 547명의 난민이 각각 남아있다. 뉴질랜드나 미국, 혹은 다른 안전한 제3국 재정착의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던 이들에겐 희망적 소식이 좀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6월 리비아 인근 지중해에서 고무 보트를 타고 표류하던 난민들이 구호단체 대원들을 발견하자 도움을 청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의 난민은 7,000만명이 넘는다. AP 연합뉴스
지난해 6월 리비아 인근 지중해에서 고무 보트를 타고 표류하던 난민들이 구호단체 대원들을 발견하자 도움을 청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의 난민은 7,000만명이 넘는다. AP 연합뉴스

기약 없는 재정착에 지쳐 결국 고국으로 돌아간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해 5월 기준 646명으로, 이는 2013년 이래 마누스섬에 수용된 전체 인원(1,523명)의 42%에 이른다. 고국이 안전해졌다고 생각해서 귀국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컨대, 미얀마의 로힝야족 제노사이드(대량학살)가 정점에 이르던 2017년 9월, 호주 정부는 마누스의 로힝야 난민들에게 ‘미얀마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귀향 자금을 제공하겠다’면서 사실상의 압박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영국 가디언 보도에는 압박감을 못 이겨 귀국 결정을 내린 로힝야 난민 7명의 심경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한 난민의 말은 이랬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죽고 싶지 않다. 차라리 미얀마에서 죽겠다. 내가 미얀마에 도착하자마자 불교도들이 아마도 나를 죽일지 모른다. 호주는 우리가 죽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세계난민의 날 하루 전인 19일 UNHCR이 발표한 ‘글로벌 트랜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지구상 난민의 수는 총 7,080만명에 육박한다. 유엔은 1분마다 25명이 박해를 피해 타국을 향하고 있다고 전했다. 난민 위기가 날로 악화하는 건 단지 숫자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마누스와 나우루 사례에서 보듯, 1,000명도 되지 않는 난민들조차 ‘부자 나라’ 호주는 지독하게 거부하고 있다. 극우 포퓰리즘과 반(反)이민 정서가 고조되고 있는 지구촌의 단면이 마누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편, 호주의 비인도주의적인 난민 정책에도 역설이 있다. 올해 마누스섬은 세계 킥복싱 챔피언을 탄생시켰다. 지난달 4일 파푸아뉴기니에서 열린 세계킥복싱연맹(WKF) 주관 대회에 참가해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파키스탄 출신 난민 이자툴라 카카르는 기자와의 메신저 인터뷰에서 “미국 재정착을 위해 심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소식에 지친 그는 이제 미국에 가지 않고, 파푸아뉴기니에 남기로 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여전히 마누스의 고통을 느낀다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난 15개월간 (파푸아뉴기니 수도) 포트모르즈비에 숨어 지내면서 킥복싱 훈련을 했다. 마누스ㆍ나우루 난민들을 위해 챔피언이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고, 꿈을 이뤘다. 내가 재능이 있듯, 마누스 동료들 모두 재능이 있다. 정치가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양 무시하지만 포기하지 않겠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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