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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아는 엄마 기자] 즐길 줄 아는 요즘 아이들

입력
2019.06.22 13:00
수정
2019.06.23 10:5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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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쯤 전, 퇴근하고 집에 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아이가 “엄마, 나 이거 해보면 안돼?”라며 학교에서 받은 안내장을 내밀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주최하는 과학축제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초∙중∙고등학생들이 개인이나 팀으로 출전해 로봇, 코딩, 가상현실 게임, 드론, 3차원 프린팅 등 다양한 최신 기술을 겨루는 대회다.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건 막지 않는 편이라 흔쾌히 허락했다.

아이는 친한 친구와 같이 출전해보자고 이미 의기투합한 상태였다. 대회 홈페이지에 접속한 아이가 출전하기로 했다는 종목을 가리켰다. ‘배틀 로봇 축구’. 그렇게나 좋아하는 축구와 로봇을 한꺼번에 또래 친구들과 겨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전에 제작된 로봇을 조종해 정해진 경기장 안에서 2분 동안 두 골을 먼저 넣는 팀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조종기 다루는 손놀림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녀석이니 해볼 만하겠다 싶어 호기롭게 참가 신청 버튼을 눌렀다.

대회를 2주 가량 앞두고 신청이 접수됐는지 확인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아뿔싸. 참가자가 자기 로봇을 제작해 직접 가져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됐다. 경기장에 사전 제작된 로봇이 비치돼 있고 그걸 조종해 겨루는 줄 알았는데, 완전 낭패였다. 출전한 아이들 모두 당연히 같은 로봇으로 경기를 해야 공정하다고 생각한 탓에 경기 규정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

우리 집엔 예전 방과후학교 수업 때 썼던 로봇 교구가 있지만, 함께 출전할 아이의 친구는 교구가 없었다. 부랴부랴 여기저기 수소문해 간신히 로봇 교구를 빌렸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일주일 만에 여러 팀을 대적할 만한 튼튼하면서도 잽싼 로봇을 설계해 만들어내고 경기 전략까지 짜야 했다. 그때부터 퇴근 후 내내 아이와 로봇 고민에 빠졌다.

처음엔 로봇 몸체를 가볍고 날렵하게 만들었다. 이 구조를 작동시켜 보니 달리는 속도와 드리블 면에서 유리한 듯했지만, 막상 덩치 큰 상대 로봇과 부딪히면 금방 고꾸라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높이를 확 낮추는 대신 면적과 무게를 늘리기로 했다. 아이들이 실전 중에 뒤집어져도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윗면과 아랫면을 비슷한 형태로 납작하게 설계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무거워져도 속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모터도 빌려다 보강해야 했다.

결국 싹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조립했다. 메인보드와 모터, 건전지 등 로봇 구동에 꼭 필요한 구성 요소들은 최대한 수평으로 배치했다. 적외선 센서, RF 수신보드, 블루투스 모듈, 조종기 등을 이것저것 바꿔가며 가장 잘 움직이는 구성을 찾아냈고, 전원 세기와 모터 개수, 총 무게까지 대회 규정의 조건에 하나씩 맞춰 나갔다. 대회 전날 오후가 돼서야 한판 붙어볼 수준은 되겠다 싶은 로봇을 완성했다. 나름대로 공격과 방어 전략을 세우고 몇 차례 시험 운영도 해봤다.

아이들은 이튿날 아침 설렘과 긴장을 안고 일찌감치 대회장으로 출발했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첫 경기에서 지면 그 자리에서 탈락이었다. 우리 팀은 운이 좋았다. 32강을 부전승으로 통과하고 16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운은 딱 거기까지. 16강전에서 0대 3으로 참패했다. 성능 좋은 교구로 무장한 상대팀 로봇에 우리 팀의 플라스틱 로봇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 팀 모터도 우리 것과 비교가 안 되게 비싼 제품이었다는 후문이다.

사전 제작 로봇을 개인적으로 가져와 출전하면 공정하지 못한 대회가 될 거라는 예상이 맞아 떨어진 듯했다. 참가자의 로봇 제작이나 조종 능력보다는 얼마나 좋은 교구로 로봇을 만들었는지가 경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대회가 불공정한 것 아니냐, 결국은 돈이 승부를 결정하는 것 아니냐, 과학 대회가 아이들의 순수한 꿈을 되레 꺾어 놓는 것 아니냐는 둥 하루 종일 아이 앞에서 불평을 쏟아냈다.

그런데 속상해 하는 엄마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가 위로를 건넸다. “엄마, 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부전승 안 했으면 더 좋았을 걸. 경기 두 번 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아이에겐 순위가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지 보다 경기 자체가 더 중요했다. 수상에 더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부전승 기회가 대회를 실컷 즐기고 싶었던 아이에겐 오히려 큰 아쉬움으로 남은 것이다. 대회라고 하니 승리와 순위에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엄마를 아이는 부끄럽게 만들었다. 로봇축구 대회에 나간 소년들과 젊은 월드컵에 나간 청년들은 그렇게 어른 세대와 달랐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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