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정여울의 마음풍경] 행복한 가정에서도 트라우마는 발생한다

입력
2019.06.20 04:40
29면
0 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세상의 온갖 트라우마를 혼자 다 수집한 사람처럼 온몸이 상처투성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누군가가 기분이 나쁠 때는 ‘혹시 나 때문이 아닌가?’라는 자책감에 잠 못 이루고, 항상 자존감이 낮았을 뿐 아니라, 누구의 칭찬도 나를 진심으로 다독여주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1등을 하면 ‘다음에도 1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도 쉬지 못하고, 친구들과 놀고 싶다가도 ‘공부 안 하면 엄마한테 혼날 텐데’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놀이의 진정한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친구가 없다는 생각에, 짙은 외로움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녔다. 끊임없이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달려갔지만,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늬만 엄친딸’이고 속으로는 ‘난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우울한 자기인식을 안고 살아가던 나는, 융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분명히 내 안에 있다는 믿음을 선물해준 융 심리학 덕분에 나는 조금씩 ‘내 안의 빛’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 안에도 빛이, 그것도 온 세상을 비추고도 남을 만한 환한 빛이 있다’는 것을. 그런 내면의 빛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데, 우리가 그 빛을 의식화하지 못하고 있을 뿐임을.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는 상처투성이 내 마음이 지극히 정상임을 알게 되었다. 행복한 가족으로 보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도 실은 ‘밝고 따뜻한 페르소나’를 집단적으로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게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라고 주장하면서, 자식을 스파르타보다 더 혹독하게 다그치는 부모들, 아내를 착취하는 남편들, 때리지는 않아도 매일 냉담한 언어와 표정으로 서로를 학대하는 가족들. 마음 깊숙이 원망과 증오를 숨긴 채, 사람들은 사랑하는 연기를 하고 있다. 사랑이 부족해서 상처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아주 많이 사랑하지만, 아주 깊이 서로를 미워하는 복잡한 애증의 관계는 이렇게 우리 가슴 속에 깊은 트라우마의 터널을 만든다. 부모가 습관적으로 던지는 폭언이나 욕설은 아이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되어 가슴에 박힌다. “도대체 커서 뭐가 될래?” “넌 그래서 안 돼.” “꼴 좋다!” “네가 그럴 줄 알았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아니었으면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지 않아!” 아이에게 과도하게 기대하고, 심각하게 실망하는 이 감정의 패턴은 아이에게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징벌의 사고방식을 각인시킨다.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순간에도 자기를 비하하고, 타인의 사랑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주 행복해 보이는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랐지만 ‘트라우마가 없는 척’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트라우마가 없는 척 말끔하게 위장할 에너지로 트라우마를 고백하고 치유했다면 나는 더 밝고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나지 않았을까.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힘들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건강한 아이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다’라는 뿌리깊은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더 많이 웃어 주고,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칭찬해주는 부모의 사랑 앞에서 아이는 스스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가족 안의 상처를 치유하는 최고의 출발점은 바로 누군가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시작하는 것이다. 얼마 전 동생에게 고백했다. 오직 나만 생각하느라 너를 많이 외롭게해서 미안하다고. 나에게 동생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그랬더니 동생이 볼멘소리로 그런다. “언니, 그 말을 우리 어렸을 때 해줬어야지.” 난 더욱 미안해졌다. “언니가 미안해. 언니가 철없고 이기적이었지. 이젠 용서해줄 거지?” 우리는 깨달았다. 이 수줍은 사과와 고백으로 인해, 이제 우린 더 깊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정여울 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