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오유)에 연재한 귀신 이야기를 엮어 괴담집을 낸 문화류씨 작가(오른쪽)와 그를 발굴한 김민섭 작가가 책을 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다. 매년 그래왔듯, 별다른 약속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문화류씨’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연재 중이던 소설의 추천수가 갑자기 올라 이상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때 ‘christmas’로 시작하는 수상쩍은 이름으로 이메일이 왔다. “안녕하세요. 김민섭입니다. 출판을 제안 드립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하루 늦게 도착한, 인생의 가장 커다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이메일을 받은 작년 12월 26일부터 지금까지도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에요.” 출판을 제안 받은 글들은 최근 ‘저승에서 돌아온 남자: 옛날 귀신 편’ ‘무조건 모르는 척하세요: 현대 귀신 편’ 두 권의 괴담집으로 엮여 나왔다. 지난 10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를 찾은 문화류씨(본명 류청경) 작가는 인터뷰도 난생 처음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책에는 도깨비, 손각시, 장산범 같은 전통귀신부터 베란다 귀신, 술 귀신, 21세기 귀신 등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귀신까지 다종다양한 귀신을 다룬 이야기 서른 편이 담겼다.

분량도 소재도 스타일도 제각각이지만, 모두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오유)에 연재됐던 작품이다. 류 작가를 발굴한 것은 책 ‘대리사회’와 ‘훈의 시대’ 등을 쓴 김민섭 작가다. 김 작가는 지난해 ‘출판업계의 발견’이라는 평가를 받는 김동식 작가를 발굴하기도 했다. 오유에 연재되던 소설을 엮어 ‘회색 인간’과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등의 책을 냈다. 책은 출간 1년 만에 시리즈 모두 합쳐 10만부가 팔렸다. 주물노동자 출신에 글쓰기를 한번도 배워본 적 없는 김동식 작가가 써낸 놀라운 이야기에 출판계는 낯설고도 반가운 충격에 휩싸였다. 기획자부터 탄생경로까지, 류 작가는 ‘제2의 김동식’인 셈이다.

문화류씨 작가(오른쪽)는 자신처럼 오유에 연재하던 글로 출판한 김동식 작가를 보고 “나도 김민섭 기획자에게 연락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1년 뒤, 바로 그 김민섭에게 출간 제의 이메일을 받았다. 홍윤기 인턴기자

“사실 김동식 작가의 성공 이후, 출판사에서 김동식 같은 작가를 1년에 한 명씩만 찾아 데려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글을 쓰는 작가는 많았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작가는 많지 않았어요. 그때 문화류씨 작가가 오유에 올린 ‘여우스님’이라는 글을 봤죠. 분명 귀신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시선이 닿아요.”(김민섭)

류 작가가 커뮤니티에 연재를 시작한 2017년 12월 무렵은 마침 김동식 작가의 책이 막 출간돼 언론과 독자의 관심이 쏟아지던 때였다. 류 작가는 ‘나도 김민섭의 눈에 띄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김동식 작가가 등장하고 딱 1년 후 김민섭 작가의 연락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온라인 소설의 홍수 속에서 ‘인간을 애정하는 작가’를 찾아 헤매던 기획자와, ‘자신을 알아봐 줄 기획자’가 필요했던 작가. 딱 들어맞는 조합이었다.

김 작가가 표면적으로는 귀신 이야기지만 결국엔 ‘인간 서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류 작가를 주목했다. 소설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의 사연을 다루지만 가정폭력, 청년실업 등 인간 사회의 문제가 등장한다. “죄의식, 혐오, 갈등, 불안… 사실 귀신이 주는 공포가 범죄가 주는 위협이랑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보편적으로 납득 가능한 공포를 쓰려고 해요. 난데없이 귀신이 튀어나와서 무서운 게 아니라, 누구라도 당하기 쉬운 보이스피싱이 더 무서울 수도 있거든요. 나를 포함해 누구라도 언제든 그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요.”(문화류씨)

문화류씨 작가는 ‘우연히’ 글을 쓰게 됐다고 말하지만, 만화 대여점에서 일하며 손님들에게 그가 읽고 본 것들을 추천하는 것을 즐기던 ‘이야기 마니아’였다. 홍윤기 인턴기자

류 작가는 한 포털사이트가 주최한 게임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하면서 귀신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처음 썼다. “창작 자체가 처음이었는데 입상을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글 쓰는 삶을 꿈꿨죠. 그렇다고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작가라면 결국 글을 잘 써야 할 텐데 전 그냥 ‘잔기술’이 좋았을 뿐이거든요. 그래서 모바일 게임 회사에 입사했고 콘텐츠 제작 일을 했어요.”

5년 간 쉴 틈 없이 일하고 나자 몸에 무리가 왔다. 검진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 결심했다. 회사를 위한 글이 아닌 나를 위한 글을 쓰기로.

김 작가는 김동식이란 작가의 이례적 탄생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방식의 창작과 연재, 데뷔 형식의 지속가능성을 확인했다. 노트와 타자기, 컴퓨터에 이은 새로운 글쓰기 방식도 발견했다. 류 작가는 누워서, 혹은 서서, 휴대폰의 메모장에 글을 쓴다. “이제는 책이나 대형모니터가 아닌, 6인치 스마트폰 화면으로 글을 보는 독자를 상정해야 해요. 저도 사실 누워서 휴대폰으로 류 작가 글을 읽었거든요. 스마트폰에 글을 쓰면 창작 단계부터 독자와 똑 같은 환경에 놓이게 되는 거죠. 읽는 방식의 변화가 쓰는 방식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셈이에요.”(김민섭)

류 작가는 최근 6인치 화면에 최적화된 카카오페이지로 연재 플랫폼을 옮겼다. 연재물 ‘오싹오싹 한국기담’이 웹소설 순위 2위까지 올랐다가 최근 13위까지 떨어졌다며 시무룩해 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제2의 문화류씨 작가’가 탄생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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