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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분노하다, 자조하다… 체념한 다산, 각종 저술 정리하며 마음 추슬러

입력
2019.06.20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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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장기(長鬐)의 노래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는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우암 송시열의 유배지가 이곳이었다. 포항시 제공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는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우암 송시열의 유배지가 이곳이었다. 포항시 제공

 ◇흉몽 

1801년의 신유박해는 정약종의 책롱이 발각된 것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어린 국왕을 끼고 정권의 전권을 틀어쥐게 된 노론 벽파가 남인 공서파를 품고 조정에 남아 있던 채제공 세력을 재기 불가능하도록 제거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획책해 왔지만, 번번이 정조의 비호에 가로막혀 실행에 옮길 수 없던 일이었다.

정조가 갑작스레 무너지자 화성 신도시의 꿈은 즉시 폐기되었다. 그들은 1799년에 세상을 뜬 채제공의 관작마저 사후 추탈해버렸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이익운이나 오석충 같은 이들까지 채제공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귀양 가거나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조정에는 정조의 손때 묻은 남인들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노론 벽파의 세상이 되었다. 공서파의 주요 타깃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유일한 예외가 다산이었다. 채제공과 가까웠던 이들은 알아서들 줄을 새로 섰다. 남인의 새로운 수장은 다산의 사촌 처남 홍인호였다.

서울에서 천주교도들의 목이 줄줄이 잘려나가는 동안 다산은 흉몽에 시달렸다. 캄캄한 방에서 잠을 깨면 식은땀이 흥건했다. 소문이 꼬리를 물었으나 확인할 길은 없었다. 꽉 닫힌 방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날은 더워 오는데 생선 비린내 찌든 방안에서 그는 폐인처럼 처박혀 있었다. 빈방에는 빈대가 들끓어 긁다 보면 피가 흘렀고, 이따금 지네가 벽을 타고 올라 깜짝깜짝 놀랐다. 회한이 왜 없었겠는가? 두려움이 왜 없었겠는가? 언제 다시 금부 나졸이 들이닥쳐 자신을 사지로 끌고 갈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서울 소식은 모르는 편이 나았다.

 ◇분노와 자조 

장기 유배 시절 다산이 쓴 시를 보면 현실에 분노하고 부정하다가 스스로를 자조하고 비관하더니 끝내는 내려놓고 체념하는 마음의 정리 과정이 잘 나타난다. 처음엔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해 쩔쩔맸다. ‘자소(自笑)’란 시에서는 “온 땅 가득 진창인데 갈기 늦게 요동치고, 하늘 온통 그물인데 날개 마구 펼친듯해(泥沙滿地掉鬐晩 니사만지도기만, 網罟彌天舒翼輕 망고미천서익경)”라 하여 진창에 갇힌 물고기나, 그물 속에서 날갯짓 하다가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 자신을 조소하고, “맑은 때엔 괴롭게 살 맞은 새 되었더니, 남은 목숨 이제는 그물 걸린 고기로다(淸時苦作傷弓鳥 청시고작상궁조, 殘命仍成掛網魚 잔명잉성괘망어)”라며 자학했다. 또 “답답하고 고달프게 스무 해를 지내다가, 꿈속에 조금 얻고 깨고 보니 간데 없네(圉圉纍纍二十秋 어어류류이십추, 夢中微獲覺來收 몽중미획각래수)”라고 하여 쭉정이만 남은 삶을 연민했다.

‘부용정가(芙蓉亭歌)’에서는 늦봄 방문을 닫고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 다산이 안쓰러웠던 집 주인이 봄놀이 한번 다녀오자며 안주와 술을 챙겨 나가자고 해서 모처럼 사립문 밖을 나섰던 일을 적었다. 아직 국상이 끝나지 않았던 지라 짚신에 죽장을 짚고 사립을 나서던 다산은 갑자기 정조가 살아계실 때 춘당대(春塘臺)로 납시어 꽃구경하며 낚시하던 때가 생각났다. 이에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가을비처럼 흘러내려, 되들어와 말없이 낯빛만 참담했지(泫然淚落如秋雨 현연루락여추우, 入門無語慘顔色 입문무어참안색)”라고 하고는, 잇대어 정조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지난 추억들을 하나하나 소환하며 애끊는 그리움을 달랬다.

이 와중에도 다산 형제의 남은 목숨을 겨냥한 노림수가 이어졌다. 3월 13일 장령 권한위(權漢緯)가 다산 형제를 의금부로 불러 국문을 엄하게 가할 것을 주청했고, 3월 16일, 18일, 19일, 20일, 22일, 27일까지 3월 내내 다산 형제를 다시 잡아들여 문초해야 한다는 계청(啓請)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다. 이후로도 장기와 신지도로 귀양 간 다산 형제를 다시 불러 올려 국문해야 한다는 상소가 10월에 다시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질 때까지 70차례가 넘게 빗발쳤다.

4월 28일, 다산은 장기로 내려온 지 58일 만에 처음으로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그 인편에 형님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도 함께 당도했다. 신지도에서 두릉으로 소식을 전하면서 다산에게 따로 한 통의 안부를 전했던 것이 이때 도착한 것이다. 다산은 시 ‘사형의 편지를 받고(得舍兄書)’에서 이때의 심경을 썼다. 그저 몸 성하냐는 몇줄 뿐인 편지는 다급하고 두서 없던 당시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정약전은 칡넝쿨로 노를 꼬며 시간을 죽이면서, 생선에 질려 먹기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는 입이 짧았다.

시 ‘집 하인이 돌아가고(家僮歸)’에서는 쓸쓸하고 적막한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집 소식 얻고서 좋다 했더니(謂得家書好 위득가서호),

새 근심 또 다시 만 가지일세(新愁又萬端 신수우만단).

못난 아내 날마다 운다고 하고(拙妻長日淚 졸처장일루)

어린 자식 볼 날은 그 언제러뇨(稚子幾時看 치자기시간).

박한 풍속 참으로 안타깝구나(薄俗眞堪惜 박속진감석).

뜬 말에도 아직은 불안하기만(浮言尙未安 부언상미안).

아서라 이 또한 달게 받으리(嗟哉亦順受 차재역순수)

세상살이 본래부터 괴로운 것을(度世本艱難 도세본간난).

아들은 편지에서 어머니가 날마다 운다고 썼다. 뜬 말에도 불안한 것은 연일 형제를 다시 끌어 올려 국문해야 한다는 청원이 하루가 멀게 올라간다는 흉흉한 소식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죽여야만 끝이 날 일이었다.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정약용 사적비. 포항시 제공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정약용 사적비. 포항시 제공

 ◇추록마(追鹿馬) 이야기 

하인이 내려올 때 끌고 온 말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다산의 시 ‘추록마 이야기(追鹿馬行)’에 나온다. 마재 집에서 기르던 말은 씩씩하고 날래 추록마(追鹿馬)로 불리던 녀석이었다. 올 겨울 눈 속에 갑자기 달아나 석 달 가량 멋대로 돌아다녔다. 덕분에 1월부터 벌어진 소동과 2월의 난리 통에 집안의 닭이나 개까지도 모두 약탈을 당해 성하게 남아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이 말만은 온전할 수 있었다. 소동이 가라앉자 녀석은 제 마구간을 찾아서 석 달 만에 제 발로 돌아왔다. 그래서 하인이 내려오는 길에 그 말을 끌고 왔던 것이다.

당시 안쓰럽던 다산의 마음은, 달아났다가 제 발로 돌아온 말을 보며 새옹지마의 희망 같은 일말의 상징성이라도 붙들고 싶었던 듯하다. 서울 갈 때마다 타고 갔던 그 말이 지금은 소와 한 우리에서 뒹군다. 뛰어난 자질을 이렇게 썩히니 안타깝고 민망하다. 넓은 들판 곳곳이 풀밭인데, 어째서 멀리 달아나지 않고 옛 주인을 찾아 왔느냐. 말을 이렇게 해놓고 끝의 두 구절에서 다산은 이렇게 썼다. “사람들 다 날 죽이려 해 마음 홀로 괴롭건만, 아아! 신통한 준마를 사람들은 모욕 못하리(人皆欲殺心獨苦 인개욕살심독고, 吁嗟神駿衆莫侮 우차신준중막모)” 너희가 나를 아무리 죽이려 들어도 저 준마가 있는 한 나를 어쩌지는 못하리라는 뜻을 담았다.

유배지의 생활이 두 달쯤 지나, 시 ‘하지(夏至)’를 지을 무렵 해서는 마음이 확실히 조금 추슬러졌다.

달은 삼십일에(月於三十日 월어삼십일)

하루 겨우 둥글다(得圓纔一日 득원재일일).

해는 일년 동안에(日於一歲中 일어일세중)

긴 날 또한 단 하루(長至亦纔一 장지역재일).

성쇠가 맞물려도(衰盛雖相乘 쇠성수상승)

성할 때는 늘 잠깐(盛際常慓疾 성제상표질).

보름달은 한 달에 단 한 번, 하지는 1년에 하루뿐이다. 돌고 돈다.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다산은 이 언저리부터 ‘백언시(百諺詩)’ 정리에 몰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예전 성호 이익이 우리나라 속담을 정리한 ‘백언(百諺)’을 지었는데, 운자로 배열하고 빠진 것을 채워 넣어 새롭게 편집했다. 앞부분에는 중국의 속담을 적고, 뒤편에는 우리나라 속담을 4언체의 가락에 얹어 정리했다. 우리말 속담 부분의 예를 들면 이렇다.

세 살 버릇 여든 가고(三歲之習 至于八十 삼세지습 지우팔십)

한 살 비둘기 산마루를 못 넘는다(鳩生一年 飛不踰巓 구생일년 비부유전).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一日之狗 不知畏虎 일일지구 부지외호)

개 꼬리 3년 둬도 담비 가죽 못 된다(狗尾三朞 不成貂皮 구미삼기 부성초피)

이런 방식으로 우리말 속담이 150구절이나 길게 이어진다. 다산은 뭐든 손만 대면 그 이전의 모든 것을 업그레이드 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었다.

 ◇촌병혹치, 주변 약초로 엮은 처방 

6월 9일에는 두릉 집에서 다산의 요청에 따라 의서(醫書)와 약초를 보내왔다. 다산은 이 책을 붙들고 읽었다. 아플 때는 책을 보며 자가 치료를 했다. 하루는 주인집 아들이 말했다. “선생님, 이곳 사람들은 아프면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잡아 먹습니다. 이 고장에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무료하던 다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다산은 몇 권의 의서에서 간편한 처방을 뽑고,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주치(主治)의 약재를 뽑아 해당 병의 조목 끝에 적었다. 구하기 힘든 희귀 약재는 모두 배제하고 시골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주변의 약초만 적었다. 책이라야 40장 남짓이었다. 상편과 하편으로 나눠 각각 술병과 여색으로 인한 병 항목을 상하편의 끝에 배치했다. 경계의 교훈까지 겸한 것이다. 다산은 이 간략한 책자에다 ‘촌병혹치(村病或治)’란 이름을 붙였다. 시골 사람의 병을 이 책이 혹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겸손과 유머를 담은 제목이었다. 이로 인해 이곳 사람들이 더 이상 푸닥거리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책 원본은 사라지고 다만 서문이 남았다.

다산은 8월까지 ‘백언시’와 ‘촌병혹치’ 외에 ‘이아술(爾雅述)’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 등의 저술을 정리하며 소일했다. 이따금 인편이 올 때마다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중 9월 3일에 보낸 편지의 한 단락은 이렇다. “내가 밤낮 빌고 바라는 것은 문아(文兒: 둘째 정학유)가 책을 읽는 것뿐이다. 문아가 능히 유자의 마음가짐을 지닐 수 있게 된다면 내가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밤낮 부지런히 읽어 내 이 같은 고심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9월 6일 임시발(任時發)의 대자보 사건이 일어나고, 나흘 뒤 신지도에 유배되어 있던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이 사약을 받았다. 그가 평소 남인 신서파를 두둔해 미운 털이 박혔던 것이다. 제천 배론에 숨어 있던 황사영을 찾아가 만나고 돌아오던 황심이 9월 15일에 춘천에서 검거되고, 고문을 못 견뎌 9월 26일 황사영의 은거지를 밝힘으로써 다산의 유배지로 다시 일장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졌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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