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상을 새롭게 꾸몄다. 나는 딸이 고등학교 때 쓰던 책상을 쓰고 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책상을 그 곁으로 옮겼다. 내 방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아버지 책상의 손때 묻은 낡음과 고풍스러운 디자인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딸의 책상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실용 가구인 셈이고, 아버지의 책상은 좋아하는 물건들을 올려놓은 관상용 가구인 셈이다.
자질구레해서 서랍 속으로 감추듯 집어 넣어둔 것들을 죄다 꺼냈다. 문구용품을 좋아하는 내가 예전에 사서 간직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들을 나열했다. 필사할 때 쓰는 옛날식 펜대와 잉크병을 나란히 놓고, 만년필 몇 개는 줄을 맞췄다. 내 이름이 새겨진 전각통과 빨강색 인주통도 내놓아야지. 편지를 뜯을 때 편지봉투 칼을 사용하고, 읽고 있는 책에 예쁜 책갈피를 끼우는 섬세함도 내가 즐기는 감성이고말고. 여행 갔던 친구가 선물해준 빨강 수첩도 마음에 들고, 북 스탠드와 필통도 빼놓을 수 없다. 보기 좋게 차려놓은 책상이 마치 멋진 문구 샵의 진열대 같다.
이 방과 저 방에 흩어져 있던 것들도 가져와 맺어줬다. 도자기로 된 길다란 접시와 동그란 케이스는 영국 시장에서 샀는데, 그렇게 쪼그만 물건에도 손으로 그림을 그려 넣고 뚜껑까지 갖추어 놓으니 헐값인데도 싸구려 같지 않다. 누르스름한 앤티크 가위가 낡은 맛을 보태고, 노안이 와서 구입한 커다란 돋보기는 나의 세월을 말해준다. 예쁜 색의 전시초대카드를 곧추세워놓으니 눈길이 그리로 간다. 책상 앞에 앉은 상상으로 떠오른 에스프레소 잔까지 끌어다 놓으니 장식이 따로 없다.
쓸모는 없지만 간직하고 싶어 깊숙이 넣어둔 것들도 불러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계 케이스와 재떨이도 올려놓고, 돌아가신 엄마가 핸드백 속에 넣고 다녔던 하얀 레이스 손수건도 펼쳐놓았다. 전압이 맞지 않아 못 쓰는 구식 스탠드도 이참에 어울리게 했다. 구석에 넣고 보이지 않게 했던 내가 빛을 보게 해주니까 진짜로 빛이 났다. 그것들의 생뚱맞은 조합이 심지어 아름답다.
베란다로 내보낸 탁자도 다시 꾸몄다. 오래 전에 쓰던 거울을 벽에 걸고 플라스틱 탁자에 패브릭 테이블보를 씌웠더니 베란다가 아늑해졌다. 테이블보의 무늬가 어수선한 것 같아 구식 메밀 베개에서 벗겨낸 하얀 베갯잇을 깔았더니 차분해졌다. 흰색 표지의 책들만 가져와 눕히거나 세워놓고, 아들이 뉴욕에서 사다 준 흰색 카드를 곁에 세웠더니, 뽀송뽀송하고 환해졌다. 은색 연필 깎기와 초등학교 때 친구가 선물해준 은색 소녀상까지 갖다 놓고, 예쁜 종이 박스와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돌멩이들까지 불렀더니, 더 이상 내팽개치고 버려뒀던 베란다가 아니다. 햇살이 따스하고 밝은 날, 베란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답게 살고 싶다. 신혼의 신부가 아닌데도, 내 집이 없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도 들떴던 젊음이 없는데도, 수년 전 이사 온 집이 더 이상 새집이 아닌데도, 나는 아직도 집을 꾸미고 있다. 그 일이 내 삶을 돌보고 가꾸는 일 같아서다. 더 나은 물건을 원하면서 새로운 소비를 할 생각은 없다. 물려받고, 선물로 받고, 예전에 내가 산 과거의 물건들로 나는 현재를 만들고 있다. 오늘에 집중하고 지금을 즐기려고다. 지금 지니고 있는 물건들로 지금을 누리는 삶의 방식이다. “집은 우리의 모든 것을 대표해야 한다. 자신을 매혹시키고, 행동하게 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것들로 주변을 에워싼다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긍정적인 기억을 되살려주는 매개체를 서랍이나 앨범, 혹은 찬장에 보관할 것이 아니라 밖으로 꺼내 자신의 이야기가 집 안에서 시각적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어멘다 탤벗, ‘About Happiness’ 중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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