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척수장애인용 바지에 주머니 없는 이유를 아시나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척수장애인용 바지에 주머니 없는 이유를 아시나요?”

입력
2019.06.18 04:40
19면
0 0
“장애인 전용 의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기성복과 차이가 없습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조항석(오른쪽) 하티스트 팀장과 박소영 디자이너가 지난 4월 출범한 장애인 의류 브랜드 ‘하티스트’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삼성물산 제공
“장애인 전용 의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기성복과 차이가 없습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조항석(오른쪽) 하티스트 팀장과 박소영 디자이너가 지난 4월 출범한 장애인 의류 브랜드 ‘하티스트’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삼성물산 제공

“하찮아 보이는 바지의 벨트 고리가 척수장애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나요?”

17일 서울 도곡동 삼성물산패션부문 본사에서 장애인 의류 브랜드 ‘하티스트’를 만드는 조항석(47) 팀장과 박소영(41) 디자이너는 평범해 보이는 바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소재나 디자인은 일반 기성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바지에는 여러 비밀이 숨어 있었다.

“척수장애인들은 앉아서 바지를 입어야 하기 때문에 벨트 고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리에 손가락을 끼워 끌어올려 입으시거든요. 그래서 바지를 당길 때 고리가 뜯어지지 않도록 안쪽에 천을 덧대어 튼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박소영 디자이너)

지난 17년 간 여성복과 골프 웨어 등을 디자인했던 박 디자이너도 장애인 전용 의류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특히 국내 패션 대기업에서 장애인 전용 의류를 선보이는 건 처음이라 무척 생소했다. 삼성서울병원 재활의학과,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 등과 협업하면서 척수장애인들과 직접 대면했다. 장애인들이 샘플로 만든 옷을 입어보고 불편을 느끼거나 개선해야 할 점을 알려주면 디자인에 반영하는 작업을 수백 번 반복했다. 지난 4월 출시한 ‘하티스트’가 준비 기간만 2년여가 걸린 이유다.

척수장애인용 바지에는 벨트 고리 말고도 지퍼와 주머니, 바지 밑단에 마법을 부렸다. 지퍼는 일반 의류보다 긴 것으로 달거나, 양 옆에 두 개를 더 달아 입고 벗기 편하게 만들었다. 주머니는 겉에 박음질로 모양만 냈을 뿐, 실제 바지 안쪽의 주머니는 없앴다. 유린백(소변백)을 착용할 때 주머니가 방해되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긴 탓에 주머니 부분에 땀이 차기 쉬워 피부에 땀띠가 생기기 때문이다. 바지 종아리 부분은 오픈될 수 있도록 디자인하고 이른바 ‘찍찍이 처리(벨크로)’를 해 바지 아래로 소변백을 뺄 수 있게 만들었다.

셔츠도 단추와 어깨 암홀(어깨에서 겨드랑이까지 둘레) 부분에 비밀이 있다. 손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해 단추는 자석을 활용해 저절로 붙게 했고, 암홀 부분에는 저지를 대어 신축성 있게 잘 늘어나도록 했다. 자석 단추는 대부분의 척수장애인들이 상의를 목부터 빼서 입는 점에 착안해 고안했다. 휠체어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이 팔을 자유자재로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셔츠에도 활동성을 높였다.

장애인 의류 브랜드 ‘하티스트’의 바지는 특별하다. (왼쪽 사진부터)박음질로 모양만 냈을 뿐 실제로 주머니는 없으며, 종아리 부분은 소변백을 위해 벨크로 처리했고, 지퍼도 양 옆에 달아 입고 벗기 편하게 디자인했다. 하티스트 제공
장애인 의류 브랜드 ‘하티스트’의 바지는 특별하다. (왼쪽 사진부터)박음질로 모양만 냈을 뿐 실제로 주머니는 없으며, 종아리 부분은 소변백을 위해 벨크로 처리했고, 지퍼도 양 옆에 달아 입고 벗기 편하게 디자인했다. 하티스트 제공

박 디자이너는 “척수장애인들도 청바지나 셔츠, 스커트 등 멋을 내는 옷을 입고 싶어 하지만 불편함 때문에 섣불리 입지 못하고, 큰 사이즈의 옷이나 운동복 등을 주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활동하기 편하면서도 디자인적으로 트렌디한 멋을 살리는 옷을 만들기는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디자인과 샘플이 나오기까지 일반 옷보다 2~3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래서 대량 생산 대신 소량 생산이 기본이다. 때문에 티셔츠나 바지 한 벌을 50~100장 정도만 생산한다. 대신 사이즈는 스몰(S)부터 특대형(XXL)까지 거의 모든 사이즈를 내놓았다. 출시 초반이라 장애인들이 어떤 사이즈를 선호하는지 기본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조 팀장과 박 디자이너는 지난달 전남 순천시에서 열린 ‘2019 전국척수장애인 축제대회’에 다녀왔다. 직접 장애인들을 만나 하티스트 의류 샘플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올 겨울에는 앞은 길고 뒤는 짧은 코트도 제작할 계획이다. 하티스트 제품은 접근성을 위해 온라인몰 SSF샵에서만 판매된다.

“하티스트를 수익성 측면으로 접근하긴 어렵습니다. 대량 생산을 통해 원가를 낮출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죠. 일단 사이즈 체계가 다르고, 계속 피드백 받아가면서 상품을 다변화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사업이 되기 위해 경영진이 팀을 꾸리고 오랫동안 연구개발 했으니, 하티스트가 장애인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저변이 확대됐으면 합니다.” (조항석 팀장)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