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사교장ㆍ유아 수업서 좌표 이동… 젊은 남성 수강생 비중 껑충
한 남성 직장인이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제공

“자, 오늘은 뭘 만든다고 했죠? 주꾸미 닭갈비, 우렁된장찌개 그리고 잔멸치 볶음을 만든다고 했죠? 주꾸미 닭갈비 재료인 떡하고 손질한 닭고기를 뜨거운 물에 데쳐야 하는데 어느 것을 먼저 데쳐야 하나요? 그렇죠, 떡이죠. 떡에서 나오는 전분이 닭고기의 잡냄새를 없애주니까 떡을 데친 후 닭고기를 데쳐야겠죠? 그럼 찌개에 쌀뜨물은 왜 넣는다고요? 그렇죠, 쌀에서 나온 전분이 찌개에 들어가는 음식재료들이 따로 노는 것을 잡아준다고 했죠.”

도심 속 초여름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4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최희경의 신세대 스마트 생활요리’ 강의실에는 20, 30대 수강생 10여명이 조리대에 앉아 강사의 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심히 메모에 열중하고 있다. 대부분 광화문, 종로, 명동 등 인근에 직장이 있는 이들이었다.

수강생 14명 중 4명은 남성이었다.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서툰 손놀림으로 강사의 지시에 따라 음식을 만들고 있는 젊은 남성들의 얼굴에선 직장에서 쌓인 피로 따윈 찾아보기 힘들었다.

1년 전부터 문화센터에서 요리 강좌를 듣고 있는 ‘직장인 문센족’(퇴근 뒤 문화센터에 들러 강좌를 듣는 직장인) 손재민(34)씨는 오랜 시간 홀로 살다 보니 먹거리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됐단다. 하지만 남성 직장인이 요리 강좌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 요리학원은 주부를 수업 대상으로 겨냥하는 경우가 많아 강의 대부분이 직장인 근무시간과 겹쳤다. 간혹 저녁 시간에 진행되는 강의가 있더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손씨는 “지인들이 직장과 가깝고 강의도 다양한 백화점 문화센터를 추천해서 듣게 됐다. 아직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요리를 보는 눈이 많이 넓어졌다. 수업 중 배운 조리법대로 집에서 해먹기도 한다”며 만족해 했다.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꽃꽂이를 배우고 있는 남성 직장인들. 신세계백화점 제공
◇문화센터 큰손 떠오른 2030 남성

백화점 문화센터는 1984년 동방프라자(현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가 시초다. 당시만 해도 백화점 문화센터는 부잣집 사모님들이 부를 과시하거나 사교를 위해 드나드는 곳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1990년대 중후반 백화점 문화센터가 셔틀버스 운영 등을 통해 고객 유치에 나서면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1년 백화점 셔틀버스 운행 금지로 한동안 주춤했지만, 2000년대 후반 대형마트 확산과 함께 문화센터는 또 한 번의 부흥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문화센터는 한동안 중ㆍ고등학생 자녀를 둔 40, 50대 주부들의 전유물이었다.

이제 문화센터 이용자의 주류는 ‘싱글 직장인’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롯데백화점의 올해 봄ㆍ여름 시즌 수강 고객들의 연령대별 비중을 보면 30대의 비중이 51%로 가장 높았고 20대가 25%로 뒤를 이었다. 40대는 15% 수준이었다. 2030세대 고객이 전체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셈이다. 20대 문화센터 수강생 비중은 같은 연령대 백화점 방문고객 비율보다 10.2%포인트 높고, 30대 또한 5.4%포인트 높다.

특히 20, 30대 남성이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 2017년 기준 전체 회원 중 0.5%를 차지하던 이들의 비율은 지난해 5%로 뛰어올랐고, 올해 봄ㆍ여름 학기엔 7%로 증가했다. 일부 수업은 남성 비율이 40%에 달한다. 젊은 남성 직장인들의 문화센터 입성은 과거 잦은 야근이나 술자리로 퇴근 후 여가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던 직장 문화에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워라밸(Work & Life)’ 가치가 확산되면서다.

현대백화점과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 15년째 요리 강좌를 하고 있는 최희경 요리연구가는 “4~5년 전부터 젊은층의 수강이 크게 늘었고, 특히 퇴근 시간인 오후 6시 이후 강좌는 대부분이 20, 30대 수강생”이라며 “2~3년 전부터는 퇴근한 남성 직장인들이 혼자 또는 연인과 같이 수업을 많이 듣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스마트폰을 활용한 사진 촬영 강의를 듣고 있는 김영호(38)씨는 ‘저녁이 있는 삶’을 찾은 것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김씨는 “건설사에 다니다보니 직업 특성상 술자리가 많았는데 아내가 문화센터 강좌를 권했다”며 “취미나 여가 활동을 겸하는 게 직장 생활에도 한결 도움이 된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부모가 아이 함께 그림그리기 강좌를 듣고 있다. 홈플러스 제공
◇아이와 문화센터 찾는 ‘워킹대디’들

문화센터 주말반 풍경도 바뀌고 있다. 주 52시간으로 주말 근무가 사라지자 토요일 오전 아이와 함께 문화센터에 오는 30대 아빠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아빠와 영유아 자녀가 함께 듣는 주말 베이비 강좌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홈플러스의 경우 주말에 유모차를 밀고 문화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워킹대디가 지난해(3,400여 명)보다 40%가량 늘었다. 이처럼 ‘워라밸’ 열풍을 타고 육아에 동참하려는 아빠들이 늘어나면서 홈플러스는 관련 강좌를 지난해보다 30% 가까이 많은 906종으로 늘렸다. 다른 대형마트들도 젊은 아빠를 대상으로 한 육아 프로그램을 앞다퉈 마련하고 있다. 홈플러스의 ‘아빠와 함께하는 문화센터 데이’, 롯데마트의 ‘아빠랑 함께 하는 강좌’, 이마트의 ‘와글와글 퍼포먼스’ 등이 그 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듣는 강좌는 주말에 집중돼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엔 평일 저녁 강좌도 부담없이 수강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홈플러스에서 평일 저녁시간대 아이와 엄마를 위한 베이비 강좌를 신청한 워킹맘은 전년 대비 25% 증가했다.

맞벌이 워킹맘ㆍ워킹대디의 방문 비중이 높은 오피스 및 주거상권 인근 점포에선 자연히 평일 저녁이나 주말 강좌 비중이 높다. 최근 대형마트 최초로 문화센터 수강생 1만명을 돌파한 홈플러스 대구 성서점의 경우 베이비 강좌 중 평일 저녁 및 주말 강좌가 차지하는 비중(52%)이 전체 평균(39%)보다 13%포인트가량 높았다.

아이가 강좌를 듣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추가로 신청하는 부모도 늘고 있다.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관계자는 “아이는 발레 배우고, 엄마ㆍ아빠는 필라테스를 하는 등 주말마다 온가족이 다 함께 수업을 듣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드럼ㆍ디제잉… 2030 겨냥 강의 늘어

젊은 직장인의 문화센터 수강이 늘면서 업계는 이들을 겨냥한 문화체험 및 자기계발 강좌를 대거 신설하고 교육시간도 평일 저녁과 주말에 대폭 배정하는 추세다. 증가세가 가파른 남성 수강생의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드럼 강좌’ ‘디제잉 스쿨’ ‘감성 여행사진 찍기’ 등 2030세대에 특화된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직장인이 선호하는 미술, 요리, 실내운동 등의 강좌를 1회 1∼2시간 교육으로 완성되는 원데이 특강으로 구성해 인기를 끌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방송댄스’ 같은 색다른 취미 강좌와 함께 천연 비누와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형 강좌도 마련했다.

2030세대가 선호하는 스타강사를 유치하려는 문화센터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최현아 롯데백화점 본점 문화센터 실장은 “본점은 백화점의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최고 수준의 강사진을 꾸리려 있다”며 “최근에는 20, 30대 직장인들이 크게 늘면서 강좌를 만들 때 이들이 원하는 스타강사진 섭외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센터 활성화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수강생 대부분이매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충성고객’이기 때문이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일반 고객의 백화점 월평균 방문 횟수는 1, 2회인 반면에 문화센터 수강생은 월평균 8차례 방문한다. 수업만 듣는 게 아니라 수업 전후로 매장에 들러 쇼핑을 하기 때문이다. 해당 백화점에서 연간 2,000만원 이상을 결제하는 VIP 고객 비중도 문화센터 이용자가 일반 고객에 비해 8배가량 높다.

특히 직장인 문센족 증가는 온라인 쇼핑에 의존하던 2030세대를 오프라인 매장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고객 창출’ 효과가 있다. 지난해부터 저녁시간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요가 수업을 듣고 있는 김경화(34)씨는 백화점 이용이 급격히 늘었다. 김씨는 “예전에는 생활필수품 대부분을 인터넷을 통해 샀는데 문화센터에 다니면서 백화점을 이용하는 경우가 늘었다”면서 “문화센터 강의 전에 일찍 도착해 시간이 남으면 매장을 둘러보게 되고 끝나고 나면 장을 볼 시간이 없어 백화점 식품 코너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k2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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