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서 회고전 

국내에서 곽인식(1919~1988)은 낯선 이름이다. 여러 색채의 물방울이 겹쳐 그려진 회화의 작가로 주로 알려져 있을 뿐, 일찍이 물성(物性)에 천착한 그의 전위적 작품 세계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곽인식의 작품 무대는 일찍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1940년대 이후 민감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가족 구성원이 좌익 세력으로 지목돼 그 화살이 곽인식에도 겨눠진 탓이다.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다 23세 되던 해인 1942년 귀국해 첫 개인전을 열지만, 7년 만인 194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추상주의적 회화를 비롯해 1960년대부터는 유리, 놋쇠, 종이 등 다양한 소재를 실험하면서 일본의 모노하(物派), 한국의 단색화에 직ㆍ간접적 영향을 줬다. 이우환, 박서보 등 국내 단색화 1세대로 꼽히는 거장들보다 10년여를 앞서간 셈이다.

국립현대미술관(국현)이 곽인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과천관에서 그를 재조명한다. 1930년대 시작된 그의 초현실주의 유화부터 1960~1970년대 실험적 작품, 1980년대 후반 색점 회화까지 200여점이 전시되는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서다.

곽인식의 '작품 61-100'. 패널 위에 석고를 바른 뒤 깨진 선글라스 알 두 개를 붙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일상 속 소재를 활용한 실험적인 작품이 가장 눈에 띈다. 1960년대 초 시작돼 1975년까지 이어진 작품 경향이다. “크면 클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인 유리의 특성에 매료돼 쇠구슬을 떨어뜨려 유리를 깨 만든 ‘작품 63’(1963년)이 대표적이다. 곽인식은 유리 조각을 캔버스 위에 다시 붙여 지울 수 없는 물질의 깨진 흔적을 보여준다. ‘돌로 깬 유리 그 자체를 작품화 한 작가’를 꼽을 때 이우환이 가장 먼저 거론되지만, 그에 앞서 곽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패널에 석고를 두께감 있게 바르고 깨진 선글라스로 장식한 ‘작품 61-100’(1961년), 황동판을 휘게 하고 조금 찢은 뒤 다시 구리선으로 꿰맨 ‘작품 65-6-2’(1965년) 등도 그의 전위적 세계를 보여준다.

곽인식의 1960년대 작품은 ‘균열과 봉합’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정치ㆍ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재료를 깨뜨리거나 찢는 균열 내기 작업으로 좌우익의 대립이나 분단을 보여주는 동시에, 흩어진 재료를 다시 접합하며 융합, 공존의 바람을 담는다. 곽인식은 남북통일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온 것으로 기록된다. 1961년 ‘평화통일 남북문화교류촉진문화제’에 참여하고, 같은 해 재일조선인총연합회화 재일대한민국민단 계열의 미술가협회가 연합한 ‘연립미술전’을 기획한 것이 대표적 예다.

곽인식의 '작품 No.11'. 돌을 주워 점을 새겼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물질에 대한 그의 실험은 1970년대 후반 들어서 더욱 과감해진다. 돌, 나무 같은 자연 속 소재가 작품 전면에 등장하고, 이를 인위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시도한다. 강에서 가져온 돌을 쪼개 다시 자연석과 붙이거나, 나무를 태워 만든 먹을 다시 나무 표면에 칠하는 행위로도 작품을 구성하는 식이다.

국현은 묻혀 있던 곽인식의 작품을 한 데 모으기 위해 2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훑었다. 전시작 200여점 중 100점은 미공개작이다. 특히 이 중 48점은 국현이 직접 복구 및 보존 처리했는데, 그간 국현이 기획한 전시 중 가장 많은 수다. 소재가 워낙 다양한 데다 작품을 만드는 방식 또한 까다로워 6개월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전시는 9월15일까지다.

곽인식의 '작품 1958'. 1950년대엔 패전 후 일본의 불안하고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 다수 제작됐다. 신체가 왜곡돼 눈알이 강조되거나 손발 같은 특정 부위가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 등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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