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법조계 출입기자 시절 어떤 대법관이 감사원장으로 간다는 소식에 부적절하다고 지적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사법부 독립이라는 거창한 대의에 기대기는 했으나 당시 법원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 기사였다. 보수 성향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장을 받은 이용훈 사법부가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그 대법관을 친선사절로 보냈다는 뒷말이 무성한 터였다. 대법관이던 이회창씨의 감사원장 직행을 제외하고 전례를 찾기 어려웠던 고위 법관의 행보에 당시 법원 안팎에서 ‘권력의 시녀’를 운운했던 게 기억난다.
오랜 전 기억이 떠오른 건 청와대 법무비서관 임명 논란 때문이다. 지난달 임명된 김영식 법무비서관은 현직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1월만 해도 내정설에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펄쩍 뛰었다. 그러다 법복을 벗은 지 딱 3개월만에 청와대 발령이 났다. 부장판사에서 청와대로 직행한 김형연 전 비서관에 이어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인사였다. 바통을 주고 받은 법무비서관이 공히 법원 내 진보성향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코드 인사’라는 의심도 강하게 들었다. 전ㆍ현 비서관의 마지막 임지가 인천지법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법원 내부에서는 “이번 정부서 출세하려면 국제인권법은 물론 인천지법을 통해야 한다”는 자조적인 비아냥까지 돌았다고 한다.
법무비서관은 사법정책과 관련해 대통령을 보좌하는 법률 참모다.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의 임명 문제 등 청와대와 사법부의 현안을 조율하고 소통 창구로 기능한다는 이유로 과거 정권에서도 판사 출신들이 맡았다. 그러나 그 때마다 논란이 적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에서 강한승 부장판사가 사직과 동시에 청와대로 직행하면서 논란이 됐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법원을 사직한 지 3년이 지난 판사 출신을 임명했는데도 뒷말을 낳았다. 사법부 독립을 해친다는 우려였다. 실제 사법농단 수사와 재판을 통해 판사 출신 법무비서관이 청와대와 법원의 부적절한 거래의 고리였음이 드러났다.
고위 법관의 청와대 직행 논란은 여러모로 검찰의 어두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는 청와대 파견이라는 형식으로 현직 검사를 데려다 수족처럼 부렸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과 공정한 직무 수행을 저해하는 관행은 20여년 전 ‘검사의 청와대 파견 금지’를 명문화하는 검찰청법 개정 이후 근절되는 듯했다. 하지만 검사가 사표를 낸 뒤 청와대로 갔다가 비서실 업무가 끝나면 법무부가 검사로 재임용하는 편법으로 관행은 살아 삼았다. 박근혜 정부에서 계속되던 악순환은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 ‘검사는 퇴직 후 1년 동안 대통령비서실 임용을 제한한다’ 는 관련법 개정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이 규정을 어겼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은 적이 없다. 이런 추세라면 검사의 청와대 파견 관행은 근절 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판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청와대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검사와 달리 판사 출신의 청와대 직행을 금지할 명문 규정이 없는 게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김형연 법무비서관 임명 논란이 불거지자 판사 출신의 청와대 직행에 제한을 두자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식물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현행 법으로 판사 출신의 청와대 참모 임용이 불법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입법 미비를 핑계로 관행을 끊지 않는다면 독립이 지상의 목표인 사법정의는 어떻게 찾을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시간 날 때마다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면 사회 변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최근 만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파인텍 노동자들의 최장기 굴뚝 농성은 물론 KTX 해고 여승무원, 쌍용자동차 사태,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 문제 등의 갈등 해결 사례를 꼽아가며 정권교체를 실감한다고 했다. 그러나 권력과 사법부의 유착 관행을 지속한다면 누가 저런 말에 동의하겠는가. 판사의 청와대 직행 관행을 방치한다면 개혁의 레토릭이 빛만 바랠 뿐이다.
김정곤 사회부장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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