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3> 나의 아버지 이육사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 인터뷰… 고문으로 어머니가 해준 솜바지 피로 물들어
아버지 원고 더 있었지만 6ㆍ25 때 잃어버려… 경찰이 항상 집앞 지켜 트라우마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의 이육사 시인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내 고장의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 다가오면 이육사(본명 이원록ㆍ1904~1944ㆍ건국훈장 애국장) 시인은 우리 마음에 살포시 떠오른다. 그의 시들이 더욱 아름답고 강력한 이유는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정신이 글을 떠받히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시인’의 한 명으로서 이름 높지만, 독립운동 과정과 가족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이자 이육사문학관 상임이사로 근무하는 이옥비(78) 여사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이육사문학관에서 만나, 가족들이 기억하는 육사의 모습을 들어봤다. 대나무로 다리 살점을 떼내는 고문을 당해 옥에서 입은 바지는 늘 피에 적셔 있었다. 베이징(北京)의 일제 감옥(일본은 1937년 베이징 점령)에서 옥사하기 약 5개월 전 중국으로 이송되면서, 역으로 찾아온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아버지 다녀 오마”라고.

지난 11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이육사문학관에서 만난 이육사 시인의 딸 이옥비 여사는 수줍음 많은 모습이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부담감을 함께 느끼는 듯 했다. 이진희 기자

-기억에 남은 아버지의 모습이 있나.

“어머니(안일양)가 중국으로 끌려가는 아버지를 배웅하러 동대문경찰서로 가시면서 이웃할아버지(육사의 7촌아저씨 이규호)에게 나를 맡겼다. 그때 할아버지가 ‘베이징으로 이송되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라고 생각하시고 부녀지간을 만나게 하기 위해 저를 청량리역으로 데리고 갔다. 그 때 아버지의 모습이 포승줄에 묶이고 밀짚 용수(통)를 썼는데, 용수에 눈과 입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내가 우리 나이로 3살이었지만 그 모습이 기억난다. “아버지 다녀 오마”하고 내게 말했다고 하는데 그 말은 기억에 없다. 또 아버지가 평소 아이보리색 양복을 입거나 보 타이(나비 넥타이)를 하셨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남들과 다른 차림새여서 기억하는 것 같다. 1969년에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조풍연(수필가ㆍ아동문학가) 선생님이 잡지에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실으셨는데, 보타이 맨 모습이었고 정확히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이어서 기뻤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기억 못하셨는데 사진을 보고 ‘네가 나보다 총기가 있나 보다’하셨다.”

※이육사는 1943년 무기를 국내 들여 오려는 모종의 계획을 가지고 중국으로 갔다가 그 해 7월 모친과 맏형의 소상(사망 후 첫 번째 제사)에 맞춰 잠시 국내 들어왔다. 이 때 서울에서 검거돼 베이징으로 이송된 후 사망(1944년 1월 16일)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질 때도 기억하나.

“경북 영천 외가에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겨울이었다. 이모가 ‘형부가 돌아가셨단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뭐가 뭔지 나는 몰랐다. 어머니와 식구들이 우시니까 이유도 모르고 따라 울었다.”

※육사의 먼 친척인 독립운동가 이병희(1917~2012ㆍ건국훈장 애족장) 지사는 베이징 감옥 건너편 방에서 육사가 콜록콜록 기침하는 소리를 밤낮없이 들었다.(‘이육사의 독립운동’, 김희곤) 이 지사가 풀려난 뒤 일주일쯤 지나 간수가 찾아와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고 했다. 시신을 화장했고, 육사의 동생 원창이 유골을 가져갔다.

-이육사 시인이 처남(안병철)과 의절했다고 하는데.

“아버지 같은 사람은 100명 중 한 명 있을까. 꿇어 앉히고 (세로로) 잘라서 삐죽삐죽 한 대나무를 다리 사이에 넣어서 훑어 내면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그런 고문을 이겨내셨다. 어머니가 해준 솜바지 마다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이겨 내지 못한다. 외삼촌이 고문을 못 이기셨다(동지의 이름을 대서 여러 명이 잡혀 들어갔다). 아버지가 외삼촌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내가 중학교 2학년 시절 시화전(이육사 작품)에서, 외삼촌이 말씀하시더라. ‘그 이후로 육사를 못 봤다, 육사는 강경하고 분명한 사람이고 나는 나약한 사람이라서’라는 회한의 말씀을 하셨다. 그것이 마음에 사무쳤는지 외삼촌은 이후에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시곤 했다. 어머니가 나중에 말씀하시길 그때 아버지가 외할아버지에게 두루마리 편지를 써서 ‘더러운 피를 가진 사람의 자녀를 아내로 둘 수 없다’고 데려가라고 하셔서 어머니도 한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이육사는 1932년 10월 의열단이 중국 난징(南京)에서 운영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정식이름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으로 들어가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 초급장교를 배출하는 학교다. 의열단원 윤세주(1901~1942ㆍ건국훈장 독립장)의 권유였고, 처남 안병철도 함께였다. 그곳에서 의열단장 김원봉도 만났다. 국내에서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고 2기생을 모집해서 보내라는 사명을 받았으나, 이렇다 할 활동도 하기 전에 1기생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안병철의 자수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이육사의 독립운동’, 김희곤)

지난 11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이육사문학관에서 만난 이육사 시인의 딸 이옥비 여사는 수줍음 많은 모습이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부담감을 함께 느끼는 듯 했다. 이진희 기자

-시인 사망 후 발표된 ‘광야’와 같은 시는 어떻게 보관했나.

“원고가 모두 집에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삼촌들(이육사의 동생들)이 와서 추려서 발표하셨다. 이후 원고가 더 있는 것을 삼촌들이 찾아냈다는데 6ㆍ25 때 다른 사람 집에 맡겼다가 그 집이 폭격을 당했다고 한다. 삼촌들이 월북을 했기 때문에 그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발견돼서 빛을 볼 날이 있을까 기대하면서 살아왔는데 소식이 없다. 어머니는 여운형 선생이 써준 제문을 태워버린 걸 아쉬워하셨다. 여운형 선생이 할머니 소상 때 제문을 써서 가지고 오셨는데, 하도 감시가 심하니 누구에게 해가 갈 까봐 아궁이에 던져 놓았는데 완전히 불이 붙어버렸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그게 아쉬워서 아버지에게 이야기 하셨더니, 아버지는 누구에게 불이익이 갈 수 있으니 ‘잘했다’고 하셨다고 한다”

※이육사는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의 여섯형제(원기ㆍ원록ㆍ원일ㆍ원조ㆍ원창ㆍ원홍) 중 둘째이다. 진성 이씨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며 원기ㆍ원일ㆍ원조도 옥고를 치르는 등 항일투쟁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원일은 서화가로, 이원조는 문학평론가로 명성이 높았다. 김균탁 이육사문학관 학예관리 주임은 “원일ㆍ원조 선생은 47년 말에 월북했다가 6ㆍ25 때 잠시 내려온 뒤 다시 북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육사가 마지막 소지했던 노트도 분실됐다. 이병희 지사는 “1943년 육사가 한국을 다녀오겠다고 떠난 후 베이징 집으로 형사가 불쑥 찾아왔는데 방구석에 놓인 육사의 소지품(노트와 필기구 등)이 걱정이 됐다”고 했다. 이 지사는 체포하려는 형사에게 ‘옷을 갈아입고 가겠다’고 해서 밖으로 내보낸 뒤 육사의 소지품을 다락에 치웠다. 감옥에 가니 육사는 이미 한국에서 잡혀와 있었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경상북도동립운동기념관장)는 저서 ‘이육사의 독립운동’에서 “그 때 숨겨둔 육사의 소지품, 특히 작품과 여러 정황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노트를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저작권 한국일보]그래픽 강준구 기자/2019-06-17(한국일보)

-이육사는 동지 윤세주를 남달리 생각했다고 하는데.

“ ‘연인기((戀印記ㆍ육사의 수필)’에 나오는 S를 두고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가 사귄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해도 후손이 더 있으면 의지하고 좋을 것 같았다.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삼촌들도 S는 윤세주 선생이라고 하시더라. 두 사람의 깊은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안 했던 것 같다. 윤세주 선생의 종손녀와 요즘도 만나고 있다. 윤세주 선생의 유품을 챙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시더라. 신석초 시인도 아버지와 ‘진심으로 사귄 친구였다’고 하셨다. 내가 ‘아버지가 독립운동하셨던 것 아셨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석초 시인께서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육사처럼 강인하지 않아서’ ‘육사는 잠시 어디 다녀오겠다 정도의 이야기만 했고, 눈밭 길을 좋아해서 육사가 가기 전에 ‘눈 밟자’, 답설(踏雪)하자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 하셨다.”

※ 1941년 발표한 ‘연인기’에서 육사는 난징의 고책사ㆍ골동품점을 드나들다가 아담하고 섬세한 비취인장(翡翠印章)을 얻었고, ‘얼마나 그것이 사랑스럽던지 밤에 잘 때도 손에 들고 자기도 하고, 여행할 때도 그것만은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했다. 상하이(上海)를 떠나 조선으로 돌아오게 됐을 때, ‘꼭 목숨 이외에 사랑하는 물품’을 주고 싶어 S에게 주고 왔다. 육사는 ‘지금 S가 어디 있는지 십년이 가깝도록 소식조차 없건마는, 그래도 S가 그 나의 귀여운 인을 제 몸에 간직하고 천대산(天臺山) 한 모퉁이를 돌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강으로 강으로 흘러가고만 있을 것 같이 생각된다’고 썼다. 윤세주 지사는 항일운동을 지속하다 1942년 타이항산(太行山) 일대에서 전사했다.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2016년 논문에서 육사의 ‘청포도’ 시 구절 중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에서 지칭하는 ‘손님’을 윤세주라고 해석했다. 도 교수는 “전통 한시에서 청포는 짙은 남색에 가까운, 세탁을 하지 않아도 표시가 잘 나지 않는 옷으로, 흔히 미관말직이나 지방 관리의 복장이거나 벼슬을 하지 못한 비천한 사람의 복장”이라며 “중국에 망명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입던 복장이기도 하다”고 했다.

※신석초 시인은 1943년 신정에 육사와 함께 임업시험장(현 홍릉수목원) 눈길을 걸었으며 그때 육사가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엘 가려네’라고 말했다고 썼다.(‘이육사의 인물’, 신석초) 이옥비 여사의 말에 따르면, 베이징에 가기 전에 한 번 더 답설을 하기로 약속했던 것 같다.

-이육사의 딸로 사는 것은 어떤가.

“아버지가 요시찰 인물이라 집 앞에 항상 경찰 두 명 정도가 총을 매고 지키고 있었다. 내게 트라우마였나 보다. 이사 갈 때마다 집 근처에 우연히 경찰서가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다니는 게 싫어서 학교 갈 때면 먼 길로 돌아서 갔다. 선생님이 내가 지각한다고 어머니에게 알려서 어머니가 회초리를 드셨는데, 사실대로 말하니 안 때리셨다. 어머니는 내게 ‘행동거지 잘못하면 아버지 욕보이는 것’이라고 하셨다.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이름이 부담이었다. 호적등본을 보고 소문이 났는지 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알고 계셨고 내게 아버지 시를 낭송하게 했다. 싫었다. 아버지가 내 백일에 이름을 지어주셨다. 옥비(沃非), 기름지게 살지 말라는 욕심 없이 배려하며 살라는 뜻이다. 어머니에게 배려심을 배웠고 남을 배려하며 살았지만 나는 소극적인 성격이며 평범하다. 돌아보면 아버지가 바라는 인물은 못된 것 같다.”

-아버지 시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사람들은 서정적이라서 ‘청포도’를 많이들 좋아하시더라. 나는 ‘꽃’을 가장 좋아한다. 꽃을 예쁘게만 보지 않고 강인함을 드러내서 좋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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