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최고령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는 긴즈버그가 팔굽혀펴기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올해 한국 나이로 87세가 되는 여성, 다큐멘터리가 촬영된 시점을 감안한다 해도 80대 중반인 여성이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운동하는 노인만 상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노인으로 살아가게 될 나의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내게는 노화의 공포가 있다. 뚜렷하게 감각하지도 못하면서 본능적으로 가진 공포다. 나는 질병과 가난, 고독이 없는 나이 듦을 상상하지 못했다. 노년의 나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도 없을 뿐더러, 떠올리려고 하면 무섭고 괴로워지기 때문에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가 80대에 현역 대법관으로 일하며, 그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서 근력운동을 하는 여성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최근 비슷한 충격을 안겨준 또 다른 인물은 올해 한국 나이로 73세가 되는 박막례 유튜브 크리에이터다. 박막례님의 모습을 손녀 김유라 프로듀서가 담아내는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면서, 나는 한국 노년 여성의 삶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 볼 기회를 얻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실생활에서는 물론이고 픽션으로서도 한국 여성 노인의 삶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노년 남성이야 당장 국회에만 가도 볼 수 있고, 드라마만 틀어도 줄기차게 나왔지만, 한국의 노년 여성은 어떻게 일하고 무엇을 즐기면서 살아 가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박막례님을 보면서 알게 됐다. 나는 여성 노인이 새로운 일에 기꺼이 용감하게 도전하면서 끝까지 해보겠다는 말을 남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70세가 넘어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상상 역시 해 본 적이 없었다. 미래를 기대하며 예상치 않은 삶의 도전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것을 살아 버텨 낸 삶에 대한 축복으로 바꾸어 놓는 여성 노인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어쩌면 나는 관찰하고 발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 또한 그렇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음을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지금은 30대, 비혼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만 사고가 없다면 나는 70대, 80대, 또 90대의 여성으로 나이 들어갈 것이다. 노화가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재앙 또한 아님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며 당연하게 겪어야 할 일인 것을 인정하며 나이 들고 싶다. 이제는 정말로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때도 긴즈버그 대법관처럼 나의 일을 하고 더 잘 해내기 위해 운동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박막례님처럼 인생이 뒤집어질 정도로 멋진 기회를 70세, 80세가 넘어서 맞이한다면 있는 그대로 만끽할 수 있다면 좋겠다. 고 이희호 여성운동가처럼 새로운 세대의 여성이 남성 중심의 세상과 맞설 때, ‘단호하게, 당당하게’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지만, 체력을 유지하면서 배움에 열린 마음을 갖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가기로 한 내가 어떻게 나이 들어갈지 이제는 기대가 된다. 현실에서 그들을 볼 수 있어 상상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어디에서든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더 많은 노년 여성의 이야기를 볼 수 있기를.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충실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노년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만, 더 많은 젊은 세대의 여성들이 그들에게서 자신들의 미래를 앞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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