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교민1세대 사업가 조현보 대표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Yogyakarta)에서 가방제조사업을 하고 있는 교포 조현보(63)대표는 90년대 초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교민 1세대로 성공한 사업가로 통한다. 한국자유총연맹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지회장을 역임하고 있기도 하다.
“연간 수억불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들이 있어 자신은 성공한 사업가 범주에 들지 못한다”며 겸손해하지만 총 2만1,000평규모의 2개 공장에, 종업원만 4,000명을 거느리고 있는 대형 기업의 경영자다. 그의 회사는 아디다스, 이글, 스위스 등 가방유명브랜드 10개를 OEM방식으로 제작, 48개국에 수출해 연간 800억 규모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가정도 남부럽지 않다. 남매를 두고 있는 그는 36살의 딸이 결혼해 사위와 함께 아버지를 돕고 있고, 32살의 아들은 고려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아내는 이 같은 화목한 가정을 일군 과묵한 내조자다.
◇ 사탕수수밭에서 시작해 IMF도 너끈히 극복하고 승승장구
조 대표는 원래 한국에서 보석 관련 사업을 했다. 우연히 족자카르타의 술탄, 즉 왕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사탕수수밭에 공장을 지어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꾸준히 성장해 오늘에 이르렀다.
고비도 있었다. IMF였다. 외환위기를 한국만의 고통이었다고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조 대표의 설명을 들어보면 다르다.
“당시 동남아국가들에 어쩌면 한국보다 더 큰 쓰나미가 밀려왔습니다. 달러당 루피아(인도네시아 화폐)환율이 2-3배나 치솟았습니다. 특히 수입업자들은 대부분 도산했습니다.”
조 대표도 그때 가장 힘이 들었다. 협력업체들의 연이은 도산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돌파구는 없었다. 쓰나미가 다시 밀려갈 때까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이 바뀌었다. 고환율 덕택에 수출이 늘면서 오히려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나 고난이 닥치더라고 잘 참고 견디면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성공 비결 중의 하나로 현지인과의 화합을 꼽았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현지인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사업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업에서는 노사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입니다. 근로자의 협력과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물론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결코 애쓴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조 대표는 사업을 하면서 노사관계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고 했다. 사장인 내가 우리 직원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나를 먹여 살린다는 것으로.
그러면서 인도네시아 국민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잘못된 편견도 지적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국민의 85%가 이슬람이라는 것 때문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한국인들이 많지만 기우에 불과하다”면서 “직접 겪어보면 이렇게 순수하고 순진할 수 없으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조 대표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인내심이 뛰어나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나날이 늘면서 교통체증이 심해지고 있지만 교통사고가 거의 나지 않는다. 서로 양보하고 기다리는 미덕 때문이다. 도로에 신호등이 거의 없지만 경적을 울리거나 고함을 지르면서 싸우는 장면이 연출되지 않는다. 조 대표는 “성격 급한 한국 사람이 보면 이상해 보일 정도로 ‘혼잡 속의 평온’이 유지되는 풍경”이라면서 “싫어도 웃고,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잘 내지 않는 토속문화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누고 봉사하는 문화, 그리고 토론 문화도 아주 잘 발달돼 있다고 전했다. 종교적 영향으로 서로 돕고 봉사하려는 마음이 강할 뿐 아니라, 사회 의무로 내려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끝장토론 문화는 우리나라가 배워야 할 정신문화”라고 강조했다.
“인도네시아는 3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데다 네덜란드와 일본 등 외세의 오랜 지배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다민족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역과 인종이 다양하다 보니 강압과 지시보다는 토론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야망을 품고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조 대표는 인도네시아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해온 만큼 현지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조금만 더 부지런하면 정말 세계 속의 경제강국이 될 것”이라면서 “인도네시아를 평범한 동남아국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나라의 면적이 한국의 10배 정도 되는 데다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자원이 풍부합니다. 인구만 보더라도 2억6,000만명에 달합니다. 우리나라의 4배가 넘습니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될 것이란 예측은 미국의 모 연구소가 내놓은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인도네시아는 그 예측을 충분히 성취할 수 있는 국가입니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의 젊은이에게도 한마디 했다. 취업난이 극심한 국내에서만 머물려 하지 말고, 인도네시아와 같이 성장잠재력이 높은 해외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서 성공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대한민국의 국부가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상관없습니다. 후진국 중에도 자원이 풍부하고 잠재력이 높은 국가들이 많습니다. 이들 나라에 우리 젊은이들이 진출해 실력을 발휘한다면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크게 높아질 것입니다.”
그는 해외 진출 성공의 조건으로 색다른 의견을 하나 내놓았다. “진출한 나라에 뼈를 묻을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
“사업을 시작할 때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생을 마감하겠단 결심을 했다면 사업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커졌을 겁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 나라에서 선거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의견을 그 나라 정부에 반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고,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정계로 진출해 시장, 도지사, 가능하다면 대통령에도 도전해야 한국인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 사이의 우호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국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야망을 가지고 도전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관계도 더욱 깊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인도네시아가 한국을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해서 조 대표는 “인도네시아와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국가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문화가 인기입니다. K팝은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 듣고 부르는 노래이고,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현지 분위기를 잘 살려 한국과 잠재력 높은 인도네시아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니, 이 같은 분위기를 대한민국 정부와 우리 젊은이들이 잘 활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조 대표는 인도네시아 한인회에서 민간대사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국자유총연맹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지회장을 맡는 등 한인회 행사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서 신망이 높은 이유다. 매년 40-50명의 학생에게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 다문화 가정출신 아이들이 평창올림픽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물품지원도 했다. 그는 “해외에 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애국자가 된다”며 자신을 낮췄다.
사업에 대한 포부와 열정도 아직 식지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사업 전환도 한번 시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한 사업은 10년 이내에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여건이 되면 다른 업종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인도네시아 교포1세대인데, 첫 세대가 터를 잘 닦아야 다음 다음 세대가 수월하게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하는 교포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나오고 영향력이 더 커져야 합니다. 이들이 정말 열심히 살면서 한국과 인도네시아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두 나라가 서로를 도우며 번영을 누리는 미래가 열릴 수 있습니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30대 청년 못잖은 열정이 샘솟고 있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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