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서양 건축의 양식사가 곧 교회 건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겝니다. 당대의 모든 기술과 재물을 동원해서 지어야 하는 게 왕궁과 교회인데, 왕궁은 기본적으로 거주 공간이기 때문에 표현에 제약이 있으나 교회 건축은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교회 건축은 서양에서 당대 문화의 총화여야…”(123쪽)
유명 건축가인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이 지난해 유럽 여행 중 함께 한 지인들을 대상으로 서양 건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내용 중 일부다. 여행은 동숭학당 수강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동숭학당은 승 위원장 주도로 2014년 만들어진 건축 관련 교육 과정이다. 지난해 공간을 주제로 강좌를 열었는데, 예전부터 많은 요청이 있었던 수도원 기행이 강좌와 어울리겠다 싶어 여행을 기획하게 됐다. 책은 이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승 위원장의 간단한 설명에서 엿볼 수 있듯 수도원 순례만으로도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서양 건축사를 가늠할 만하다.
여행 일정과 코스부터가 눈에 띈다. 로마에서 파리까지 2,500여 ㎞를 열흘 동안 독파했다. 하루 평균 250㎞를 이동한 고단한 여정이었다. 차로 움직이기만 해도 많은 시간을 소비할 만한 거리인데, 여러 수도원을 들러 기독교와 건축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까지 가졌다. 여행 이틀째인 6월 27일 일정만 봐도 피로가 몰려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북쪽으로 150㎞를 달려 아시시에 도착해 성 프란체스코의 흔적과 성지를 답사한다. 점심 식사 후 130㎞ 떨어진 중세 도시 시에나를 들러 경사진 원형 광장을 본다. 시에나에서 오후 반나절을 보낸 후 50㎞를 이동해 탑상 도시 산 지미냐노에서 황혼을 맞이하고 하루 묵는다. 강행군과 ‘알찬’이란 수식이 동시에 따를 만하다.
여행의 기록은 꼼꼼하게 적혀 있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저자가 일행보다 먼저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 겪은 일들,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접하고 듣고 느낀 내용들이 520쪽을 채운다. 도시의 풍광과 수도원의 외관, 성당의 모습, 수도원 내부 등을 담은 사진은 모두 흑백이다. 사진도 글도 책을 지배하는 정서도 모노크롬 톤이다.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이들(수도사)만이 가지는 평화, 그 실체가 과연 무언가”를 찾는 여행기답다. 요컨대 책은 “내적 충만과 영적 성숙을 위해 마련한 여행”의 분위기에 충실하다. 책은 여행기인 동시에 저자가 내면에 침잠하는 에세이기도 하다. 한때 신학자를 꿈꿨고 건축을 통해 ‘빈자의 미학’을 실현하려는 승 위원장의 세계관이 녹아 있다.
종교와 건축에 대한 정보가 쏠쏠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 성 프란체스코를 기리기 위해 만든 아시시 대성당이 하부와 상부로 따로 나뉘어 각각 로마네스코와 고딕 양식으로 신속하게 만들어진 사연은 당대 건축 기술과 더불어 성 프란체스코의 위상을 보여준다. 당대인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성 프란체스코의 분묘를 조성하는 한편 경사진 언덕 위에 성당을 탄탄히 지으려 했다.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한 하부 성당은 건축 속도가 빠른 로마네스코 양식으로 짓고, 이후 상부 성당은 막 유행하려던 고딕 양식으로 시간을 들여 건설했다.
묵상
승효상 지음
돌베개 발행ㆍ520쪽ㆍ2만8,000원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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