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코브(1931~2019)

※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제리 코브는 1950년대 말 미 항공우주국 NASA의 우주비행사 선발 데스트의 모든 과정을 압도적인 성적으로 통과, 인류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 후보로 각광받은 파일럿이다. 그는 미국 정부와 NASA의 젠더 차별 때문에 끝내 우주비행사가 되진 못했고, 63년부터 항공 선교사로 자신의 경비행기를 타고 남미 아마존과 안데스 오지에 의료 생필품을 전하는 봉사로 남은 생을 보냈다. 우주 비행의 꿈이 꺾이기 전인 61년 5월의 코브. AP 연합뉴스

미 공군 군의관 윌리엄 러브레이스(William Lovelace II, 1907~1965)는 전투기에 제트엔진이 달리기 시작한 1930년대 말부터 고도와 기압 변화에 따른 파일럿 생체 반응 및 적응력 개선에 몰두한 선구적인 항공의학자이고, 산소마스크와 낙하산 등 장비 개량에도 기여한 공학자다. 그는 공군의 유인우주탐사계획(MISS)과 미 항공우주국(NASA) 우주비행사 선발 프로젝트의 특별자문위원회를 이끌며 체력과 심리, 생체기능 등 87개 항목의 테스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감독했다. 그와 NASA가 공군 엘리트 파일럿들을 대상으로 거르고 걸러 1959년 4월 세상에 소개한 7인의 예비 우주비행사가 존 글렌(John Glenn, 1921~2016) 등 이른바 ‘머큐리 세븐(Mercury 7)’이었다. 그들은 대 소비에트 우주전쟁을 이끌 미국의 영웅, 이를테면 캡틴 아메리카들이었다.

그 무렵 러브레이스는 ‘여성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몸무게도 가볍고, 밥도 물도 산소도 상대적으로 덜 마시니 적재 중량도 그만큼 적을 터였다. 당시 로켓 기술 수준에 그건 엄청난 장점이었다. 게다가 그는 여성의 심장 질환이 적고, 물리적 고통과 기온 변화, 고독감 등을 견디는 데도 더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WP) 훗날 ‘Right Stuff, Wrong Sex’란 책을 쓴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 역사학자 마거릿 와이트캠프(Margaret Weitekamp)는 좀 다른 이야기, 즉 러브레이스가 대규모 우주정거장 시대에 대비해 비서나 간호사 역할을 맡을 여성 인력이 필요하리라 여겨 시작한 일이었다고 말했지만(theverge.com), 어쨌건 러브레이스는 NASA 공식 프로젝트와 별개로 뉴멕시코 앨버커키의 개인 연구소에서 여성 우주비행사 선발 테스트를 시작했다.

1959년 9월, 러브레이스의 제안으로 테스트에 처음 참여한 게 28세 여성 비행사 제리 코브(Jerrie Cobb)였다. 코브는 파리 에어쇼에 출전한 첫 여성 파일럿으로서 미국인으로선 네 번째로 국제항공연맹의 골드윙 메달을 획득한 뒤 경비행기 고도 및 속도, 비행시간 세계기록(남녀불문) 3관왕을 넘어 기록 도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에게 중력과 대기권을 벗어난다는 건 엄청난 유혹이었다.

이듬해인 1960년 러브레이스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우주과학국제심포지엄’에서 “제리 코브가 ‘머큐리 7’을 비롯한 모든 남녀 후보자를 통틀어 상위 2% 기록으로 모든 테스트를 통과했다”(WP)고 발표했다. 코브는 일약 세계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 후보로 여러 언론 매체에 소개됐다. 한 기자회견에서 코브는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우주보다 메뚜기가 더 무섭고, 우주에 혼자 나가는 것보다 지금처럼 기자들이 가득 찬 방에 있는 게 더 두렵다”고 대답했다.(popsci.com)

그 결과에 고무된 러브레이스는 그게 코브의 특수한 경우인지 확인할 겸, 여성 우주비행사 테스트 프로젝트를 확대했다. 60년대 초 미국의 현역 여성 파일럿 700여 명 가운데 비행 경력과 나이 등을 따져 25명을 추렸고, 그 중 체력 등 1,2차 테스트를 12명이 통과했다. 그들과 코브를 훗날 언론은 ‘머큐리 13’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97년 자서전(‘Jerrie Cobb: Solo Pilot’)에 썼듯이 그의 조국은 여성에게 우주를 내줄 마음이 없었다. 여성 우주비행사 이야기가 여론을 달구자 당혹스러워진 NASA는 61년, 우주비행사가 되려면 일정 시간의 제트기 테스트파일럿 경력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을 공표했다. 한 마디로 여성은 안 된다는 거였다. 미 공군 테스트파일럿스쿨이 여성 입학을 허용한 건, NASA가 첫 여성 우주비행사를 선발한 1978년보다 더 뒤인 1982년이었다.

논란 끝에 열린 62년 하원 청문회에서 코브는 “우리는 성 대결(battle of the sexes)을 벌이려는 게 아니다. 단지 내 나라가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의 우주에는 여성도 차별 받지 않고 서 있을 자리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nyt)

다른 얘기지만, 2009년 국무장관이던 힐러리 클린턴이 방한 중 이화여대 연설에서 14세 무렵 NASA에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가 “여성 선발 계획은 없다”는 답장을 받고 첫 좌절과 분노를 경험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WP, 2015.11.30). 청문회 직후 코브가 당시 부통령 린든 존슨에게 들은 답변은 이러했다. “만일 우리가 당신이나 다른 여성에게 기회를 주면, 흑인에게도, 멕시칸 아메리칸에게도, 아니 모든 소수자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 지금 우린 그럴 형편이 못 된다.”(CBS, 2007.5.12) BBC 과학저널 ‘사이언스 포커스 매거진’에 따르면 그 무렵 NASA의 한 관료는 “여성 우주비행사는 사치이며, 결국 우주의 쓰레기(waste in space)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공부문 젠더차별을 금지한 64년 민권법이 제정되기 2년 전이었다.

러시아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1937~)는 이듬해 6월 보스토크 6호를 타고 70시간 50분 동안 지구를 48바퀴 돈 뒤 귀환해 여성 최초 우주비행사가 됐고, 그해 제리 코브는 항공선교사로서 자신의 쌍발기 ‘에어로 커맨더’를 몰고 남미 아마존 오지로 떠났다. 그는 이후 거의 평생, 아마존 밀림과 안데스의 항로를 개척하며 지도를 만들고, 오지 원주민들에게 항생제와 의료진, 옷과 식량 등 생필품을 실어 날랐다. 거기라고 성 편견과 차별이 없진 않았지만, 페루 첩자로 몰려 에콰도르의 감옥에 갇히는 일도 겪었지만, 훗날 남미의 여러 국가는 그에게 여러 영예로운 상과 훈장을 수여했고, 81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런 저런 부산한 행사가 끝나면 코브는 곧장 아마존 밀림 속으로, 그의 작은 경비행기 속으로 숨듯이 사라지곤 했다.

딱 한 번, 그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 미국 언론과 워싱턴 의사당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상원의원까지 지낸 77세의 존 글렌이 1998년 노인병 연구를 명분으로 2차 우주비행에 나선다고 NASA가 발표한 직후였다. 그는 노인병 연구가 목적이라면 노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성인 만큼 67세의 자신에게도 자격이 있다고, “돌아오지 못해도 좋으니 기회를 달라”고, “내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AP 인터뷰에서 호소했다. 전미여성협회(NOW) 등이 그를 응원하는 캠페인과 청원운동을 벌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98년 6월 NASA 국장 대니얼 골딘(Daniel Goldin)은 “코브의 경력은 익히 알지만, 우주비행사가 되려면 후보로 공식 등록해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NASA는 상시 후보등록 창구를 열어두고 있고, 2년마다 후보를 선발한다. 당장엔 노인 우주 비행 추가 계획이 없지만, 만일 계획이 바뀌면 코브를 후보로 진지하게 고려하겠다.” 코브는 다시 아마존으로 돌아갔다.

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지구인들이 마침내 달 표면에 섰다는 소식을, 코브는 아마존 정글 야간 비행 중 무전으로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 감격스러워,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그 밀림의 달빛 아래에서 비행기의 좌우 날개를 기우뚱거리며 혼자 춤을 추었다고 자서전에 썼다. “물론 나도 거기 그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대기 간섭 없이, 캄캄한 우주 배경 위에 뜬 푸른 행성 지구의 아름다움을, 뭇 별과 찬란한 은하를, 나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형제들을 위해 아마존 위를 날고 있는 지금의 나도 행복하다. ‘contenta, Senor, Contenta.(I am happy, Lord, happy)’”

최초의 예비 여성 우주비행사로서 마지막까지 우주를 꿈꾼, 오지의 솔로 파일럿 제리 코브가 3월 18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1960년 10월 자신의 쌍발기 에어로 커맨더 조종석에 앉은 제리 코브(위 , AP)와 그해 NASA의 다축자이로스코프 테스트 훈련 중인 그(아래, NASA).

제럴딘 “제리” 코브(Geraldyn “Jerrie” Cobb)는 미국 대평원 남부 오클라호마 주 노먼(Norman)이란 도시에서 공군 중령으로 예편한 아버지(William)와 주부 어머니(Helena Stone Cobb)의 두 딸 중 차녀로 1931년 3월 5일 태어났다. 아버지 직업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녔고 성격도 내성적인 편이어서, 그는 또래보다 들판의 말과 노는 걸 더 즐겼다고 한다.(WP, 위 기사) 12살이던 43년, 아버지의 경비행기 ‘와코(Waco)’의 지붕 없는 조종석 뒷자리에 방석을 받치고 앉아 처음 비행한 해본 뒤, 말 안장에 앉아 담장 없는 들판을 달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다고 훗날 말했다. 그는 16세에 자가용 면장(PPL)을, 18세에 사업용 면장(CPL)과 지상 파일럿 강사 자격증을 땄고, 법정 비행시간을 채운 뒤 항공기 운송용 조종사(ATP) 면장을 잇달아 땄다. 경비행기 ‘페어차일드 Fairchild PT-23’를 갖고 싶어, 돈을 모으려고 소프트볼 준프로팀에서 약 1년간 선수 생활을 했고, 오클라호마여대(OCW)를 1년 만에 중퇴한 뒤 송유관 항공 순찰과 농약 및 씨앗 항공 살포 아르바이트를 했고, 지역 항공사 파일럿 조교로도 일했다. 51년 플로리다 신생 항공사의 쌍발 여객기 ‘DC-3’ 조종사 모집 공고에 이력서를 내던 20세 무렵의 그는 이미 비행시간 3,000시간을 넘긴 경력자였지만, 면접관은 그가 여성이어서 채용하지 않았다. 그는 오클라호마로 돌아갈 여비가 없어 마이애미공항의 항공기 관리 파트 타이피스트 겸 문서 정리원으로 취직해야 했다.

세상은 그의 비행 경력과 기량보다 푸른 눈에 갈래머리 금발의 외모에 더 집착하곤 했다. 60년 ‘라이프’지는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 후보인 그를 알리는 기사에 가슴 사이즈를 함께 소개했다. “당신처럼 예쁜 여성이 왜….”하는 식의 말은 ‘머큐리 13’ 모두가 지겹게 들어야 했던 질문이었다.(sciencefocus.com).

52년 그는 플로리다 한 항공기 국제운송업체(Fleetway Incorporated)의 운송 파일럿으로 취업했다. T-6 텍산 등 훈련기를 몰고 남미 등지 군 기지로 배달하는 일이었다. 거기서 제리는 B-17 폭격기를 포함 60여 종의 프로펠러 기종과 1종의 제트기를 경험했고, 업체 사장이던 파일럿 잭 포드(Jack Ford)와 약혼했다. 알려진 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인 잭 포드는 55년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코브가 비행기록 도전에 몰두한 게 그 무렵부터였다. 최고 속도와 논스톱 최장 비행기록, 최고 고도…, 그는 자신과 엔진이 닿을 수 있는 한계까지, 그 너머까지 나아가고자 했다. 러브레이스가 제안한 중력 너머의 세계는 그에겐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넷플릭스의 2018년 다큐멘터리 ‘머큐리 13’에는 59년 테스트를 통과한 ‘머큐리 7’의 남성들이 자신들이 받은 테스트의 혹독함을 과시하듯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성들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장비로 그 테스트를 받았다. 1m짜리 고무관을 삼키게 해 위 점막 반응을 점검하고, 얼음물을 귓속에 흘려 넣어 균형감각과 현기증 대응력을 테스트하고, 다축 자이로스코프의 회전에 장시간 몸을 맡기고, 빛도 소리도 차단된 밀폐 수조의 물 위에 뜬 채 일정시간 공포와 불안과 환각을 견디고…. 당시 22세였던 ‘머큐리 13’의 최연소자 월리 펑크(Wally Funk)는 그 수조에서 무려 10시간 35분을 평온하게 버텨 실험교관들을 질리게 했고, 코브의 9시간여 기록도 모든 남성 기록을 압도하는 거였다.

여성 12명의 테스트는 61년 9월, 최종 단계 직전에 중단됐다. 플로리다 펜사콜라의 해군비행학교 등이 NASA의 공식 요청 없이는 테스트 공간과 장비를 제공할 수 없다고 나선 탓이었다.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이 미 의회 연단에 서서 10년 내에 달에 우주인을 보내겠다고 선언(61년 5월 25일)한 직후였다. NASA의 모든 예산과 장비, 인력이 아폴로 계획을 중심으로 재편됐고, 체제 전쟁이나 다를 바 없던 그 절박한 상황에서 젠더 이슈는 ‘사치’였다. 그런 배경과 분위기가 62년 청문회에도 반영됐을 것이고, 러브레이스가 코브 등을 어떤 명분으로 설득해 참여시켰든, 그 계획은 넷플릭스의 다큐나 여러 서사물들이 넌지시 암시하는 것과 달리 ‘국가 비밀 프로젝트’도 NASA의 공식 프로젝트도 아니었다. 테레시코바는 소비에트 당 기관지 이즈베스티야 인터뷰에서 “미국 정치 지도자들은 말끝마다 민주주의 체제를 자랑하면서 여성에게는 우주로 나갈 기회를 박탈했다. 명백한 차별이다”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영국의 첫 우주비행사 겸 과학자로 미르 정거장에서 임무를 수행한 헬렌 셔먼은 1991년 기자회견 도중 우주에서는 어떤 속옷을 입고 얼굴 크림은 어떤 걸 바르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웃으며 “ 미르에 가는 건 아주 거친 캠핑 여행이어서 립스틱을 챙겨가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테레시코바조차 90년대 보스토크 6호의 궤도유도시스템 오류와 그의 침착한 궤도 수정 등 진실이 공개되기까지 근 30년 간 서방은 물론 그의 조국 러시아에서조차 노골적인 비하와 음해에 시달려야 했다. NASA의 첫 유인우주탐사 총괄책임자였던 크리스 크래프트가 왜 미국은 60년대에 여성 우주비행사를 선발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테레시코바도 비행 직후부터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 ‘깡통(basket case)’이나 다를 바 없었고, 무사히 돌아온 게 행운이었다”고 말한 게 1997년이었다. 물론 하나도 안 맞는 말, 틀린 말이 아니라 거짓말이었다.(sciencefocus.com)

'머큐리 13'은 90년대 미국 언론이 '머큐리 7'에 대비해 만든 명칭이고, 그들은 스스로를 'FLAT(First Lady Astronaut Trainees)'이라 불렸다. 95년 NASA의 초청으로 플로리다 기지를 방문해 우주왕복선 앞에 선 그들. 왼쪽 세 번째가 제리 코브. NASA

제리 코브는 아폴로 소식뿐 아니라 샐리 라이드의 감격적인 지구 저궤도 비행(83년)이며 챌린저 호 참변(86년) 등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맥박이 요동치곤 했을 것이다. NASA의 달라진 젠더 정책을 지켜보면서도 그가 선뜻 나서지 못한 건 스스로 너무 나이 들어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존 글렌의 98년 디스커비리 비행과 그의 좌절은, 마지막이어서 더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미국 우주개척사의 영웅이자 영화 ‘히든 피겨스’의 신사 존 글렌은 62년 청문회 증언대에서 “비행기를 몰고 전쟁터에서 싸운 것도, 전장에서 돌아와 항공기 디자인을 개량하고 안전성을 테스트한 것도 우리 남자들이다. 우주 비행에 여자의 자리가 없는 건, (차별이 아니라) 사회의 질서다”라고 말했다. 제리 코브는 98년 7월에도 워싱턴D.C에서 글렌과 15분간 독대했다. 대화는 내내 우호적이었고 서로의 축복을 빌며 헤어졌다지만, 글렌은 끝내 코브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제리는 “(그래도) 글렌은 여전히 내 친구이며, 나는 그가 잘 해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spaceref.com)

제리 코브가 언제 아마존 활동을 접고 영구 귀국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그는 우주왕복선(디스커버리 호)의 첫 여성 선장 에일린 콜린스(Eileen Collins)의 99년 우주왕복선 프로젝트 사령관 취임식 등 여성 우주인이 빛나는 자리에 초대를 받으면 어김없이 참석에 그들을 격려하곤 했다. 2012년 미 우주항공 명예의전당(NAHF)에 이름을 올리며 그는 “나는 개척자가 아니다. 단지 마음껏 날지 못한 한 여성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뜻이었는지 어쩐지, 그의 부고는 한 달여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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