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크림전쟁 발라클라바전투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854년 10월25일 오전 5시경, 파벨 리프란디가 지휘하는 약 2만5,000명의 러시아군은 서쪽으로 전진을 개시했다. 이들의 목표는 흑해 연안 항구 발라클라바의 탈환이었다.
약 한 달 전인 9월14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러시아 영토인 크림반도에 상륙했다. 1년 전부터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투르크를 돕는다는 명분 하에 참전한 거였다. 아무리 러시아가 강하다 해도 당대 최강국인 영국과 프랑스를 동시에 상대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실제로 9월20일 알마에서 벌어진 최초 전투에서 약 3만6,000명의 러시아군은 5만9,000명의 영국-프랑스-투르크 연합군에게 속절없이 패했다.
◇오해로 날린 속전속결 기회
크림전쟁에서 연합군의 핵심 목표는 요새화된 크림반도의 군항 세바스토폴이었다. 알마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곧바로 공격했다면 세바스토폴 점령은 식은 죽 먹기였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알마전투의 패배를 듣고 세바스토폴을 잃었다고 속단할 정도였다.
승리한 연합군은 다르게 생각했다. 러시아군이 예상보다 강하다고 느낀 나머지 남하를 주저하다가 전투 후 3일 뒤인 9월23일에야 전진을 재개했다. 그 동안 남은 러시아군은 동쪽으로 이동해 재정비를 마쳤다. 연합군은 장기전을 대비하며 세바스토폴 남쪽의 항구 발라클라바를 점령하고 세바스토폴을 포위했다.
연합군은 빼앗은 발라클라바에 4,000명을 배치했다. 발라클라바 방어의 핵심은 코즈웨이고도에 설치한 여섯 개의 보루였다. 보루는 영국해군의 12파운드 포 9문과 투르크군 1,500명이 지켰다. 보루와 보루 남쪽의 발라클라바 사이에는 1,200명의 영국 해병대와 600명의 93스코틀랜드연대가 위치했다. 93스코틀랜드연대의 바로 서쪽에는 발라클라바 수비대에 속하지 않는 1,500명의 1개 영국 기병사단이 자리잡았다.
코즈웨이고도를 지키던 투르크군은 오전 6시부터 약 두 시간 동안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보루를 뺏겼다. 이제 기세가 오른 러시아 기병을 막을 부대는 영국 기병사단과 93스코틀랜드연대뿐이었다. 세바스토폴을 포위 중인 영국군 2개 보병사단이 발라클라바까지 내려오려면 최소 두 시간 이상 걸렸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들
영국군 총사령관 피츠로이 서머셋은 보병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기병을 아끼고 싶었다. 오전 8시, 서머셋은 기병사단장 조지 빙햄에게 “보루 왼쪽의 땅을 차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곧 93스코틀랜드연대 혼자서 1만명 이상의 러시아 기병을 상대하라는 의미였다. 빙햄은 93스코틀랜드연대만 남기는 서머셋의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이 싸우게 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같이 이동시켜 나중을 도모함이 이치에 맞았다. 그럼에도 빙햄은 명령 받은 대로 기병사단을 보루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오전 8시30분, 서머셋은 새로운 명령을 빙햄에게 내렸다. 중무장한 드라군, 즉 용기병부대로 흔들리는 투르크군을 도우라는 명령이었다. 빙햄은 이번 명령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루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 투르크군은 이미 발라클라바 근처까지 도망간 뒤였다. 명령은 무조건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 빙햄은 중기병여단을 원위치로 되돌렸다. 경기병여단은 이동했던 코즈웨이고도의 서쪽에 그대로 남았다.
서머셋과 동시대를 산 프로이센 군인이자 전쟁이론가 카를 클라우제비츠는 발라클라바에서 벌어질 일을 예견했다. 클라우제비츠는 1806년 예나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완패한 프로이센군의 일원이었다. 1831년 병으로 사망한 후 출간된 그의 유고작에는 ‘전쟁의 안개’라는 말이 나왔다. 전투는 안개 속을 걸어가는 일과 비슷하다는 의미였다. 즉 불확실성과 운은 회피할 수 없는 전투의 본질이란 것이다. 불확실성은 가격이 널을 뛰는 금융시장의 본성이기도 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전투의 불확실성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아군의 실제 전투력이었다. 둘째는 적군의 병력과 전투력이었다. 마지막 셋째는 적군의 실제 의도와 행동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불확실성 때문에 전투는 늘 혼동 그 자체였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열정, 운, 이성으로 이뤄진 삼위일체”라고 지적했다.
◇황당한 전술에도 연전연승
오전 9시경, 93스코틀랜드연대는 2열 횡대로 벌려 섰다. 자신들을 향해 전진해오는 러시아 기병과 폭을 맞추려는 시도였다. 93스코틀랜드연대는 자신보다 20배 이상 병력이 많은 러시아 기병을 너무 우습게 여겼다. 이런 경우 정사각형의 방진을 구성하는 게 정상이었다. 기병이 약간의 손실을 감수하고 돌격하면 얇은 횡대는 쉽게 유린할 수 있었다.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횡대 대열은 그러나 러시아군을 혼란스럽게 했다. 대열 뒤에 대규모 예비 병력이 잠복하고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돌격을 중지하고 코즈웨이고도로 물러났다. 붉은 상의와 치마를 입은 93스코틀랜드연대의 당시 모습은 이후 ‘얇은 적색 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빙햄은 러시아 기병을 물리쳤다고 오판했다. 성격이 급했던 그는 아직도 원위치 중이던 약 600 명으로 구성된 중기병여단에게 러시아군을 향한 즉각적인 돌격을 명령했다. 이는 중기병이 20배 이상의 적을 향해 남쪽 계곡의 저지대에서 코즈웨이고도의 고지대를 향해 돌격해 올라가라는 의미였다. 이 상식 밖의 돌격에도 러시아군은 비틀거렸다. 영국 중기병여단이 10명의 전사자를 잃는 동안 러시아군에게 250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코즈웨이고도의 러시아군이 주춤대자 같은 고도의 서쪽 약 450m에 있던 영국 경기병여단에게 좋은 기회가 생겼다. 장교들은 중기병여단을 도와 전투에 뛰어들자고 계속 건의했지만 경기병여단장 제임스 브루드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빙햄이 내린 “현재 위치에 머물러 방어하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그 사이 러시아군은 코즈웨이고도의 북쪽 계곡으로 후퇴해 대열을 재정비했다. 북쪽 계곡에는 러시아군 보병과 포병도 이미 포진해 있었다.
◇사이 나쁜 장군들이 빚은 참패
오전 10시, 보병사단이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서머셋은 마음이 급해졌다. 서머셋은 빙햄에게 “기병은 전진해 고도를 회복하라. 두 전선으로 전진하라고 명령 받은 보병의 지원이 있을 것이다”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오타 때문에 실제로 서머셋이 내린 명령은 “기병은 전진해 고도를 회복하라. 명령 받은 보병의 지원이 있을 것이다. 두 전선으로 전진”이었다. 빙햄은 이를 보병이 도착하면 전진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하고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기병사단이 움직이지 않자 짜증이 난 서머셋은 오전 10시45분 “기병은 (코즈웨이고도 보루에서) 포를 빼앗아가는 적을 향해 ‘즉시’ 돌격하라”는 명령을 빙햄에게 내렸다.
빙햄은 또다시 서머셋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빙햄 위치에선 아무런 포도 보이지 않았다. 서머셋의 명령을 전달한 대위 루이스 놀란은 대충 손을 휘두르며 즉시 돌격하셔야 한다고 채근했다. 빙햄에게 놀란의 손은 동쪽의 러시아 포병을 가리키는 듯 보였다. 그 자신도 짜증이 난 빙햄은 브루드넬의 경기병여단에게 러시아 포병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브루드넬은 “전면에 포병이, 양 측면의 고지대에도 포병이, 그리고 보병도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빙햄은 “나도 압니다만, 서머셋이 원하고, 우리는 명령을 따라야만 합니다”하고 답했다. 오전 11시10분, 670명의 경기병여단은 약 2㎞ 떨어진 동쪽의 러시아 포병을 향해 돌격했다. 살아 돌아온 생존자는 절반도 안되는 약 300명이었다.
알고 보면 1800년생인 빙햄은 1797년생인 브루드넬의 매제였다. 즉 빙햄의 아내는 브루드넬의 여동생이었다. 빙햄과 브루드넬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말을 섞지도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발라클라바전투는 전투와 무관한 의류 두 가지로도 후대에 이름을 남겼다. 하나는 추위를 막기 위해 얼굴만 나오는 방한용 모자였다. 특수부대원이나 테러범이 애용하는 이 모자를 발라클라바의 영국군이 최초로 사용한 덕분에 발라클라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앞을 단추로 채우는 스웨터, 즉 카디건이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발라클라바항구의 개인 요트에서 자다가 뛰어나왔던 브루드넬은 7대 카디건백작이었다. 나중에 브루드넬이 영국 사교계에서 유행시킨 앞트임 스웨터에 카디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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