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열린 한은 창립 69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하로 가는 문을 열어젖혔다. 불과 10여일 전까지 시장의 금리인하 기대감을 강하게 견제했던 한은의 태도에 비추면 전격적인 방향 전환이다. 그만큼 미중 무역분쟁 등의 최근 대외여건 악화를 심각하게 본다는 분석 한편으로, 정부의 통화정책 완화 요구에 한은이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2016년 이후 3년간 긴축에 맞춰졌던 한은의 정책 기조가 완화 쪽으로 선회하면서 부동산, 대출 등 자산시장 전반에도 연쇄 파장이 미칠 전망이다.

 ◇전격적인 금리인하 ‘깜빡이’ 

이주열 한은 총재는 12일 한은 창립 69주년 기념사를 통해 “최근 미중 무역분쟁, 반도체 경기 등 대외 요인의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졌다”며 “불확실성 요인에 따라 우리 경제는 성장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어 향후 통화정책에 대해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대외 여건 악화로 국내경제 성장세가 약화될 경우 기준금리를 내려 경기 부양에 나설 수 있다고 밝힌 셈이다.

이 총재의 이날 발언은 최근까지의 태도와 사뭇 다르다. 지난달 31일 금융통화위원회 후 기자회견에서도 이 총재는 “하반기로 가면 확장적 재정정책과 수출ㆍ투자 부진 완화로 성장 흐름이 나아질 것”이라며 낙관론을 유지했다. 금리인하 주장 소수의견이 나온 것에 대해서도 “소수의견을 금통위 시그널(신호)로 보는 건 무리”라며 “현재 경기는 금리인하로 대응할 상황이 아니다”고 못박기도 했다.

시장에선 이날 이 총재의 발언으로 한은이 3년째 이어온 통화긴축 기조를 사실상 종료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위기 이후 4년여 간(2012년 5월~2016년 8월) 기준금리를 총 2%포인트(연 3.25→1.25%) 낮추며 완화책을 펴온 한은은 2017년 11월과 지난해 11월 각각 0.25%포인트씩 금리를 올리며 금리인상기를 지내 왔다. 시장에선 올해 4분기 금리인하 전망이 우세하다. 일각에선 “소수의견도 나온 만큼 7, 8월 금리인하가 단행될 것”(이미선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이란 전망도 있다.

 ◇”대외 악재 대응” vs “정부 요구에 순응” 

한은의 전격적인 입장 변화 배경으로는 ‘경기전망 실패’가 우선 꼽힌다. 이 총재는 이날 발언 배경을 묻자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두 가지 대외 요인(미중 무역분쟁, 반도체 경기)이 예상보다 어려운 쪽으로 가고 있다”고 답했다. 당초 한은은 미중 무역분쟁은 조속한 타결, 반도체 경기는 이르면 2분기 중 반등에 각각 무게를 뒀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거리가 있다. 김소영 서울대 교수는 “경제 전망이 바뀌면 신속하게 통화정책 방향을 수정하는 게 중앙은행의 소임이긴 하지만, 한은의 전망이 보다 정확했다면 정책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일제히 완화적 통화정책에 나서는 흐름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연준은 제롬 파월 의장 등이 대거 미중 무역분쟁의 충격 흡수 차원에서 금리조정 필요성을 언급하며 하반기 금리인하 기대를 키우고 있다. 이달에는 호주가 올해 선진국 중 처음 금리인하를 단행했고, 유럽중앙은행(ECB)은 올해 연말이던 제로금리 기한을 내년 상반기로 연장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부의 ‘입김’을 빼면 설명이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 정부는 확장적 재정정책과의 공조를 명분으로 한은에 금리인하 요청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홍남기 부총리가 지난 4월부터 시장의 기대, 국제기구 보고서 등을 인용하며 에둘러 금리인하 필요성을 언급해온 것이 대표적이다.

그간 한은과 더불어 하반기 경기회복을 점쳐왔던 청와대도 지난 9일 윤종원 경제수석이 나서 “대외 불확실성이 예상보다 커지면서 경기하방 위험이 장기화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홍 부총리는 이날 이 총재 발언에 대해 “통화정책이 완화적 기조에 접근하고 있다”고 화답하기도 했다.

기준금리와 시장금리 추이 그래픽=강준구 기자
 ◇머니무브 가능성은 ‘글쎄’ 

다만 한은이 금리인하를 단행하더라도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란 전망이 아직 우세하다. 이미 국채 금리가 장단기물을 막론하고 기준금리(연 1.75%)를 밑돌고 있는 상황이어서, 금리인하가 더 몰고 올 영향이 적을 거란 의미다.

고재필 KEB하나은행 골드PB 팀장은 “기준금리를 내려도 만기 1년 이하 금융채 정도를 제외하면 시장금리가 조정될 여지가 적은 상황이라 금리 상품 간 대규모 자금 이동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현섭 국민은행 도곡스타PB센터 팀장은 “기준금리가 떨어져도 공격 투자 성향이 살아나야 증시를 통한 기업 자금 공급 효과 등을 기대할 수 있는데, 그러기엔 국내 경제에 대한 불안 심리가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준금리를 따라 대출금리가 내려가면 부동산 시장을 다시 자극할 거란 우려도 나온다. 이는 한은도 매우 우려하는 바다. 실제 한은 고위 관계자는 “기준금리 인하 신호만 보내도 집값 버블(거품)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 9·13 대책이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등 정부의 가계대출 억제책이 워낙 강력해 부동산 시장에 자금이 대거 유입될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