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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산증인 ‘궁궐 노거수’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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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 산증인 ‘궁궐 노거수’가 사라진다

입력
2019.06.13 04:40
수정
2019.06.13 15:07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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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내부의 회화나무가 지지대에 얹혀 있다(위 사진). 2014년 7월 폭우로 뿌리째 쓰러진 나무를 다시 심었지만 이전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 아래 사진은 1993년과 2002년 같은 나무가 건강하던 시절이다. 신지후 기자ㆍ문화재청 제공
11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내부의 회화나무가 지지대에 얹혀 있다(위 사진). 2014년 7월 폭우로 뿌리째 쓰러진 나무를 다시 심었지만 이전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 아래 사진은 1993년과 2002년 같은 나무가 건강하던 시절이다. 신지후 기자ㆍ문화재청 제공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 들어서자 허리가 90도 가까이 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지지대에 몸통을 누이고 있었다. 역사적 가치가 커 인근의 회화나무 7그루와 함께 천연기념물 472호로 지정된 수목으로, 추정 수령은 300~400년이다. 휜 모양 자체로도 조형미가 있는 덕에 관람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이 회화나무에는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2014년 7월 폭우에 쓰려져 뿌리 채 뽑혔다가 다시 심긴 것. 나무는 5년 전까지 허리를 세우고 푸른 잎을 싹 틔웠으나, 요즘은 상태가 좋지 않다. 문화재청의 최근 생육 평가(‘매우 건강-보통 이상-보통-불량-수목 쇠약‘의 5단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인 ‘수목 쇠약’ 판정을 받았다. 우기를 대비한 지반 강화, 지지대 설치 같은 예방 조치를 제 때 했더라면 회화나무는 여전히 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회화나무는 운이 좋은 편이다. 자연재해, 병충해 등에 노출됐다 적절한 보호 조치를 받지 못해 고사하는 궁궐 내 노거수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노거수(老巨樹)는 수령이 많고 풍채가 거대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수목을 뜻한다. 나무 종류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통상 100년 이상이 된 나무를 노거수로 분류한다. 특히 궁궐에서 자란 노거수는 전통 조경 복원이나 고유식물종 연구 등에 중요한 자료로 쓰이는 만큼 보호ㆍ보전 필요성이 크다.

19세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경을 그린 국보 동궐도. 문화재청 제공
19세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경을 그린 국보 동궐도. 문화재청 제공

창덕궁은 4대궁 중에서도 노거수가 많은 곳으로 꼽힌다. 2016년 기준 200년 이상 된 노거수가 34그루였고, 671년 된 느티나무와 355년 된 은행나무, 281년 된 향나무 등이 포함돼 있었다. 문제는 노거수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1976년 문화재청 조사에서 노거수로 지정된 창덕궁 내 수목은 82그루였다. 1993년엔 73그루로 줄었고, 2002년엔 71그루, 2016년엔 65그루로 감소했다. 노거수가 죽은 이유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1976년부터 2016년 사이에 사라진 노거수 17그루 중 5그루는 자연 고사했고, 2그루는 자연 재해를 입었다. 9그루의 고사한 이유는 규명되지 않았다. 나머지 1그루는 제거됐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산학협력단은 2016년 문화재청 의뢰를 받아 정밀 조사를 거쳐 창덕궁 내 새 노거수 20그루를 지정했다. 그러나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그루 중 상당수가 최근 생육 평가에서 ‘불량’ 혹은 ‘수목쇠약’ 판정을 받았다. 추적 조사라도 할 수 있는 창덕궁 노거수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창경궁(35그루), 덕수궁(33그루), 경복궁(28그루)의 노거수는 2016년 이전까지 수령이나 생육 상태 변화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 받지 못했다.

문화재청은 궁궐 안팎 관리를 체계화하겠다는 목표로 올해 2월 궁능유적본부를 별도 조직으로 출범시키고 ‘궁ㆍ능 조경관리’ 규정 등을 마련했다. 그러나 급격한 기후변화나 자연재해에 대응할 매뉴얼이나 전문가 지원 규정이 세세하게 제정되지 못해 한계가 크다는 평가가 많다. 익명을 요구한 국립대 환경조경학과 교수는 “노거수는 예민한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사적이나 유물처럼 보호해야 한다는 당국의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11일 찾은 서울 종로구 창덕궁 정원에 노거수의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신지후 기자
11일 찾은 서울 종로구 창덕궁 정원에 노거수의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신지후 기자

정부는 노거수 유실에 대비해 후계목을 적극 양성하고 관리 시스템을 강화하겠다는 정책 방향은 마련했지만, 실질적 인력과 예산은 충분히 투입하지 않고 있다. 궁능유적본부는 천연기념물을 비롯한 노거수의 유전자(DNA)를 추출해 13만㎡ 크기의 경기도 양묘장에서 후계목을 키우고 있는데, 담당자는 3명에 불과하다. 4대 궁궐과 종묘의 조경을 총괄하는 인력도 6명뿐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궁궐 노거수 현황 파악을 5년에 한 번 정도 하자는 목표는 세웠지만, 여건 상 쉽지 않다”며 “담당 조직과 기능 강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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