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원 기자

“어린이집 선생님이 화내고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라고 생각해 폐쇄회로(CC)TV 영상 열람을 요청했지만 녹화가 되지 않았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어렵게 하드디스크를 받아 복구업체에 보냈지만 ‘물리적 손상이 있어 복구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증거가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CCTV영상을 부모가 원하면 바로 보여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청와대 국민청원)

어린이집 CCTV 영상을 원하는 즉시 보여달라는 학부모들의 요구가 거세다. 지난 3일 게시된 청와대 국민청원은 12일 현재 참여인원이 3,500여명을 돌파했다. 또 다른 CCTV 관련 청원 역시 이틀 만에 200여명이 참여했다. 이번엔 서울 관악구의 한 어린이집에 원생을 보낸 학부모가 아동학대를 의심해 영상을 요구했더니 어린이집이 저장기기를 분실했다고 발뺌을 했다는 내용이다.

현행 영유아보육법은 보육교사와 여러 아동의 사생활 침해를 우려해 CCTV 열람이 가능한 경우와 절차를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지침인 ‘보육사업안내’에 따르면 부모 등 보호자는 아동이 학대나 안전사고로 신체ㆍ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의심될 경우에 한해 신청서 등 관련서류를 작성해 어린이집 원장에게 직접 영상정보의 열람을 요청해야 한다. 원장은 10일 이내에 열람 가능 시기를 알려야 하고, 열람시기는 회신일로부터 7일 이내로 정해야 하지만 사생활 침해 정도, 영유아의 이익 등을 고려해 열람을 거부할 수도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 10일 오전 부산 도시철도 2호선 경성대 경성대·부경대역 2번 출구 복도에 아동학대 신고를 독려하는 이색 홍보물이 설치돼 한 학생이 살펴보고 있다. 부산 남부경찰서는 이달 한 달간 이 홍보물을 운영할 예정이다. 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이처럼 절차가 까다롭다 보니 학부모들이 불편을 호소하거나 아동학대 의혹이 제기됐을 때 증거인멸을 우려하는 경우가 많다. 열람을 위해 원장이나 보육교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구조 자체도 문제로 지적된다. 현재도 경찰 등 관계기관 공무원을 대동하거나 피해사실이 적시되어 있는 의사소견서를 제출할 경우 즉시 열람이 가능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사실상 어린이집과 관계가 크게 악화돼 아이를 보낼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울 서초구는 지난달 31일 ‘CCTV 열람의 날’ 행사를 이달 중으로 실시하라고 국공립 어린이집에 지시하기도 했다. 어린이집이 먼저 나서서 학부모가 눈치보지 않게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반대하는 측에선 보육교사와 아이들의 사생활 침해를 우려한다. 당장 서초구 행사는 11일 열린 설명회에서 보육교사들이 격앙된 반응을 보이면서 보류됐다. 서초구는 사생활 침해를 줄이기 위해 영상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하는 프로그램을 모든 국공립 어린이집에 설치하고 난 뒤에 다시 행사를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전국공공운수노조 보육1ㆍ2지부의 이현림 지부장은 “CCTV영상을 바탕으로 수사기관에서 아동학대 혐의가 없다고 결정이 났는데도 보육교사가 일을 그만뒀어야 했던 경우가 있다”면서 “CCTV 열람 절차를 간소화하면 일부 학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 보육교사를 찍어내는데 악용할 우려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도 “항상 누군가 감시한다는 인식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아동학대를 막기 어렵다”면서 “법적 아동학대 신고의무가 있는 어린이집 종사자들이 자발적으로 CCTV 자료 제공에 협력하도록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열람 절차 간소화가 어렵다면 CCTV 관리만이라도 제3의 기관에 맡겨 훼손이나 유실 우려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대표는 “고의 훼손 우려를 막으려면 저장장치 등을 외부기관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면서 “CCTV 사각지대로 아이를 데려가는 행위도 법으로 막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우중 복지부 보육기반과장은 “아동학대의 98%는 가정에서 발생한다”면서 “어린이집에 대해서만 정부가 CCTV 설치를 강제하고 있는데 영상관리까지 외부기관에 맡기라고 하기는 어렵다”라고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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